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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글 제목: (Mahāsi Sayādaw)9~12
전체글올린 게시글: 2015-12-28, (월) 6:32 am 

가입일: 2015-01-30, (금) 10:13 pm
전체글: 103
PA¿ICCASAMUPPÆDA 9
9. IGNORANCE OF THE THIRD AND FOURTH NOBLE TRUTHS
Avijjæ also means ignorance of the cessation of dukkha and the way to it. These two truths are also profound and hard to understand. For the truth about cessation of dukkha concerns Nibbæna which is to be realized only on the Ariyan holy path and the truth about the way is certainly known only to the yogø who has attained the path. No wonder that many people are ignorant of these truths.
Ignorance of the end of suffering is widespread and so world religions describe the supreme goal in many ways. Some say that suffering will come to an end automatically in due course of time.
Some regard sensual pleasure as the highest good and reject the idea of a future life. This variety of beliefs is due to ignorance of the real Nibbæna. Even among Buddhists some hold that Nibbæna is an abode or a sort of paradise and there are many arguments about it. All these show how hard it is to understand Nibbæna.
In reality Nibbæna is the total extinction of the næma-rþpa process that occurs ceaselessly on the basis of causal relationship. Thus according to the doctrine of Pa¥iccasamuppæda, avijjæ, sa³khæra, etc give rise to næma-rþpa, etc and this causal process involves old age, death and other evils of life. If avijjæ, etc become extinct on the Ariyan path, so do their effects and all kinds of dukkha and this complete end of dukkha is Nibbæna.
For example, a lamp that is refueled will keep on burning but if it is not refueled there will be a complete extinction of flame. Likewise for the yogø on the Ariyan path who has attained Nibbæna, all the causes such as avijjæ, etc., have become extinct and so do all the effects such as rebirth, etc.
This means total extinction of suffering, that is, Nibbæna which the yogø must understand and appreciate before he actually realizes it.
This concept of Nibbæna does not appeal to those who have a strong craving for life. To them the cessation of næma-rþpa process would mean nothing more than eternal death. Nevertheless, intellectual acceptance of Nibbæna is necessary because on it depends the yogø’s whole-hearted and persistent effort to attain the supreme goal.
Knowledge of the fourth truth, viz, truth about the way to the end of dukkha is also of vital importance. Only the Buddhas can proclaim the right path; it is impossible for anyone else, be he a deva, a Brahmä or a human being, to do so. But there are various speculations and teachings about the path. Some advocate ordinary morality such as love, altruism, patience, alms giving, etc., while others stress the practice of mundane jhæna. All these practices are commendable. According to the Buddhist teaching, they lead to relative welfare in the deva-Brahmæ worlds but do not ensure freedom from samsæric dukkha such as old age, etc., So they do not form the right path to Nibban although they are helpful in the effort to attain it.
Some resort to self- mortification such as fasting, living in a state of nature and so forth. Some worship devas or animals. Some live like animals. From the Buddhist point of view all these represent what is termed sølabbataparæmæsa which means any practice that has nothing to do with the Eightfold Path.
The Eightfold Noble Path comprises right view, right intention, right speech, right action, right livelihood, right effort, right mindfulness and right contemplation. The path is of three kinds, viz., the basic path, the preliminary path and the Ariyan path. Of these the most vital is the Ariyan path but this path should not be the primary objective of the yogø nor does it require him to spend much time and energy on it. For as the vipassanæ practice on the preliminary path develops, the insight on the Ariyan leve l occurs for a thought-moment. For example, it requires much time and effort to produce fire by friction but ignition is a matter of a moment’s duration. Similarly, the insight on the Ariyan path is instantaneous but it presupposes much practice of vipassanæ on the preliminary path.

9. 멸성제(滅聖諦)와 도성제(道聖諦)에 대한 무지
무명은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滅諦]와 소멸에 이르는 도의 진리[道諦]를 모르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 두 가지 진리는 심오하여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滅諦]는 열반에 관한 것이며, 열반은 오로지 성자의 성스러운 도에서 실현할 수 있는 것이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도의 진리[道諦]는 도를 증득한 수행자만이 분명하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진리에 대해 무지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무지는 널리 퍼져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의 종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궁극의 목적을 설교합니다. 어떤 이들은 시간이 지나면 괴로움이 저절로 사라진다고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감각적 쾌락이 최고선이라고 생각하고 내생을 부정합니다.
이 다양한 설교는 모두 진정한 열반을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비롯됩니다. 심지어 일부 불교신자들도 열반을 어떤 거처나 극락세계로 여기고 있으며, 이 열반에 대한 이론이 분분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열반을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실제 열반이란 인과 관계를 기반으로 하여 끊임없이 일어나는 정신-물질 과정의 완전한 소멸입니다. 즉 연기법에 따르면 무명과 상카라[行]등이 정신-물질[名色]을 일으키고 이러한 인과의 과정으로 인해 늙음, 죽음 등 기타 삶의 괴로움이 수반되어 따라오는 것입니다. 성스러운 도(ariya-magga)에 의해서 무명이 소멸하면 그 결과물인 모든 괴로움이 소멸하며, 이러한 고통의 완전한 소멸이 바로 열반입니다.
예를 들면 기름을 부으면 등불이 계속하여 타오를 것이나 기름을 붓지 않으면 불꽃이 완전히 꺼지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성스러운 도를 닦아 열반을 증득한 수행자는 무명 등 모든 원인을 제거하여 태어남이라는 결과가 없습니다. 이것은 수행자가 실제로 열반을 증득하기 전에 반드시 이해하고 숙지하고 있어야 할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인 열반을 뜻합니다.
이 열반의 개념은 삶에 강한 갈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호소력이 없습니다. 이들에게 정신-물질의 과정이 소멸한다는 것은 단지 영원한 죽음만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반을 지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수행자의 열과 성을 다하는 부단한 노력은 이러한 이해와 받아들임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넷째 진리, 즉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도의 진리[道諦]를 아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합니다. 오직 부처님들만이 바른 도를 보여줄 수 있고 천신이나 범천, 인간과 같은 다른 존재들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도에 대한 갖가지 추론과 가르침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 박애, 인욕, 보시 등과 같은 일반적인 도덕을 설파하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세간의 선 수행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모든 수행은 칭찬할 만한 것입니다.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런 것들은 천신계나 범천계에 태어나는 상대적인 행복에 이르지만 늙음과 같은 윤회고로부터 자유를 보장해 주지는 못합니다. 비록 열반을 얻기 위한 노력에 도움이 됨에도 불구하고 열반에 이르는 바른 도를 이루지는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절식을 한다든지, 원시인처럼 산다든지 하는 고행에 의지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천신이나 동물을 숭배하기도 하고, 또 다른 이들은 동물처럼 삽니다. 불교의 견지에서 볼 때 이 모든 것은 팔정도(八正道)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수행으로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戒禁取 sīlabbata-parāmāsa)을 나타냅니다.
팔정도는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알아차림[正念], 바른 삼매[正定]입니다. 도에는 근본 도(mūla-magga), 예비단계의 도(pubbabhāga-magga), 성스러운 도(ariya-magga)의 세 가지가 있습니다.
이중에서 가장 중요한 도는 성스러운 도이지만 이것이 수행자의 일차적 목적이 되거나 그것에 지나치게 시간을 많이 쓴다든가 정력을 쏟아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예비단계의 도에서 위빠사나 수행이 발전함에 따라 성스러운 도의 통찰지가 한 의식 찰나에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마찰에 의해 불을 일으키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발화는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성스러운 도에서 통찰지는 눈 깜짝할 사이에 생기지만 이는 예비 수준의 도에서 위빠사나 수행이 충분히 이루어졌을 때를 전제로 합니다.

PA¿ICCASAMUPPÆDA 10
10. RIGHT VIEW, ETC.,
Vipassanæ insight is the insight that occurs at every moment of contemplation. The yogø who notes every psycho-physical phenomenon becomes aware of its real nature. Thus he focuses his attention on the bending of his arms or legs and he realizes the elements of rigidity and motion. This means right view in connection with væyodhætu. Without mindfulness there will arise illusion of “It is the hand.” “It is a man,” and so forth. Only the mindful yogø sees things as they really are.
The same may be said of right view in regard to sensation in the body, e.g., heat or pain and mental activities, e.g., imagination, intention. When the mind becomes fixed and calm, the yogø finds the næma-rþpa phenomena arising and vanishing and so he gains insight into their anicca, dukkha and anatta.
Right belief implies right intention and other associative dhamma on the path. Insight on the path occurs at every moment of contemplation. With the attainment of perfect insight into the three characteristics of existence, the yogø sees Nibbæna. Hence if Nibbæna is to be realized here and now, the practice of vipassanæ is essential. The yogø who cannot as yet practise vipassanæ should focus on the path that is the basis of vipassanæ practice. This basic path means doing good deeds motivated by the belief in kamma. In other words, it is the practice of dæna. søla etc., in the hope of attaining Nibbæna.
All the paths (magga)-the basic, the preliminary and the Ariyan-form the threefold path leading to Nibbæna. In particular the yogø must recognize the Ariyan path as the dhamma that is to be desired, cherished and adored. Such a recognition is essential to strenuous effort in the practice of vipassanæ. The yogø must also accept the vipassanæ magga as a noble dhamma and know how to practise it.
Some people are ignorant of the way to Nibbæna. On top of that they belittle the Nibbænaoriented good deeds of other people. Some deprecate the teaching and practice of other people although they have never practised vipassanæ effectively. Some criticize the right method because they are attached to their wrong method. All these people have avijjæ which means ignorance of and misconception about the right path. It is avijjæ not to know that dæna, søla and bhævanæ lead to Nibbæna and it is avijjæ too to regard dæna, etc as harmful to one’s interest. The more destructive avijjæ is ignorance of and illusion about the right method of contemplation.
Ignorance of the right path is the most terrible form of avijjæ. For it makes its victims blind to good deeds and creates illusions thereby preventing them from attaining human happiness or divine bliss, let alone the Ariyan path and Nibbäna. Yet mo st people remain steeped in ignorance, unmindful of the need to devote themselves to dæna, søla and bhævanæ.

10. 바른 견해[正見]
위빠사나의 통찰지는 알아차리는 매 순간에 일어납니다. 일어나는 모든 정신-물질 현상을 주시하는 수행자는 그것의 진정한 성품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수행자가 팔과 다리의 구부림에 주의를 집중하면 단단함과 움직임의 요소를 깨닫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람의 요소[風大]와 관련된 바른 견해[正見]를 뜻합니다. 알아차림이 없으면 “이것은 손이다.” “이것은 사람이다.”와 같은 착각이 일어날 것입니다. 알아차림이 있는 수행자만이 현상을 있는 그대로 봅니다.
몸에서 일어나는 감각인 열이나 통증 또는 정신적 행위인 상상이나 의도와 관련된 바른 견해(正見)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대상에 집중해서 고요해지면 수행자는 정신-물질 현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고, 대상의 본성은 무상• 고• 무아라는 통찰지를 얻습니다.
바른 믿음이란 바른 의도와 기타 도에 연관된 법을 뜻합니다. 도에 대한 통찰지는 알아차리는 매 순간에 일어납니다. 존재의 삼특상(ti-lakkhaṇa / 無相anicca, 苦dukkha, 無我anatta)에 대한 완전한 통찰지를 얻으면 수행자는 열반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열반이 지금 여기(以現法中-diṭṭheva dhamme, diṭṭha-dhamma)에서 실현되는 것이라면 수행은 필수입니다.
아직 수행을 하지 않는 사람은 위빠사나 수행의 기본이 되는 근본도(mūla-magga)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이 근본도라는 것은 업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선행(善行)을 하는 것을 뜻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열반의 증득을 바라며 보시와 지계 등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근본도(mūla-magga), 예비단계의 도(pubbabhāga-magga), 성스러운 도(ariya-magga)는 열반에 이르는 세 가지 도입니다. 특히 수행자는 성스러운 도를 열망하고 소중히 하고 받들어야 할 법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이렇게 인식함으로써 위빠사나 수행에 열성적인 노력을 기울일 수 있습니다. 수행자는 또한 위빠사나의 도(vipassanā-magga)를 고귀한 법으로 받아들여 그 수행법을 제대로 알아야만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열반에 이르는 도에 대해 무지합니다. 그래서 열반을 성취하기 위해 행하는 선한 행위를 대수롭지 않게 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위빠사나를 제대로 수행해 본 적도 없으면서 다른 사람의 가르침과 수행을 비난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잘못된 방법에 집착하여 바른 수행법을 비난하기도 합니다. 무명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바른 도를 알지 못하고 오해합니다. 보시(dāna), 지계(sīla), 수행(bhāvanā)이 열반으로 인도함을 모르는 것이 무명이며, 보시 등의 선한 행위가 자신의 이익을 해친다고 잘못 아는 것도 무명입니다. 더욱 해로운 무명은 바른 명상 수행법에 대한 무지와 환상입니다.
바른 도에 대한 무지는 가장 끔찍한 무명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무명에 휘말리는 사람은 선한 행위를 보지 못하고 전도된 인식을 품어서 성스러운 도와 열반뿐 아니라 인간의 행복이나 천상의 지복마저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명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보시, 지계, 수행을 닦아야 할 필요성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PA¿ICCASAMUPPÆDA 11
11. AVIJJÆ LEADS TO SA£KHÆRA
To them sensual pleasure is the source of happiness, Nibbæna as the extinction of næma-rþpa is undesirable and the way to it is arduous and painful. So they seek to gratify their desire through three kinds of action (kamma) viz., bodily action, verbal action and mental action. Some of these actions may be ethically good and some may be ethically bad. Some people will practice dæna, etc for their welfare hereafter, while some will resort to deceit or robbery to become rich.
A Pæ¹i synonym for kamma (action) is sa³khæra. Sa³khæra is also of three kinds, viz, sa³khæra by thought, sa³khæra by speech and sa³khæra by body. Sa³khæra presupposes cetanæ (volition). The function of cetanæ is to conceive, to urge or to incite and as such it is the mainspring of all actions. It is involved in killing, alms-giving, etc. The yogø knows its nature empirically through contemplation.
In another sense there are three kinds of sa³khæras, viz, puññæbhi (wholesome) sa³khæra, with its good kammic result, apuññæbhi (unwholesome) sa³khara with its bad kammic result and aneñjabhi-sa³khæra that leads to wholesome arþpajhæna which literally means immobile jhæna.
Rþpajhæna and all the good actions having the kammic results in the sensual world are to be classified as puññæbhisa³khæra. Puññæ literally means something that cleanses or purifies. Just as a man washes the dirt off his body with soap, so also we have to rid ourselves of kammic impurities through dæna, søla and bhævanæ. These good deeds are conducive to welfare and prosperity in the present life and hereafter. Another meaning of puññæ is the tendenc y to fulfil the desire of the doer of the good deed.
Good deeds help to fulfil various human desires, e.g., the desire for health, longevity, wealth and so forth. If a good deed is motivated by the hope for Nibbæna, it leads to a life that makes it possible to attain his goal or it may ensure his happiness and welfare till the end of his last existence.
Abhisa³khæra is the effort to do something for one’s own welfare. It tends to have good or evill kammic results. So puññæbhi sa³khæra is good deed with good kammic result. There are eight type of good deed in sensual sphere (kæmavacærakusala) and five types in fine material sphere (rþpævacæra). All these may be summed up as of three kinds, viz., dæna, søla and bhævanæ.
Giving dæna gladly means wholesome consciousness which is kammically very fruitful. So the donor should rejoice before, during and after the act of alms-giving. In the scriptures this kind of dæna is credited with great karmic productivity. The attitude of the donor may also be one of indifference (upekkhæ) but if the mind is clear, his act of dæna too has high kammic potential. Any act of alms-giving that is based on the belief in kamma is rational and it may bear fruit in the form of rebirth with no predisposition to greed, ill-will and ignorance. An act of dæna that has nothing to do with a sense of its moral value or the belief in kammic result is good but unintelligent and it will lead to rebirth with no great intelligence. It may bear such kammic fruit in everyday life but it does not make the donor intelligent enough to attain the path in his next life.
Again one may do a good deed spontaneously without being urged by others (asa³khærikakusala); some do good deeds at the instigation of others (sasa³khærika-kusala). Of these two kinds of good deeds the former is kammically more fruitful than the later. When we consider the four kinds of deeds the former is kammically more fruitful than the later. When we consider the four kinds of good deeds mentioned earlier in terms of these last two attributes, we have a total of eight types of wholesome consciousness in the sensual sphere. Whenever we do a good deed, we are prompted to do so by one of these kusala dhammas; when we practise concentration and meditation, we have to begin with these eight types of wholesome dhammas.
It is bhævanæ that can lead to jhæna, the yogø attains rþpævacæra jhæna when his samædhi is well developed. Jhæna means total concentration of mind on an object of mental training. Samatha-Jhæna is concentration for bare tranquility. Jhæna samædhi is like flame burning in still air. According to the Suttas, the rþpævacæra jhæna has four levels; in Abhidhamma it has five levels.

11. 무명(無明)을 조건으로 상카라[行]가 일어난다
사람들은 감각적 쾌락이 행복의 원천이고, 정신-물질의 소멸인 열반은 탐탁스럽지 못하며, 열반에 이르는 길은 험난하고 고통스럽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몸과 말과 뜻으로 짓는 세 가지 행위를 통해 욕망을 채우려고 합니다. 이중 어떤 행위는 도덕적으로 선할 것이며 어떤 행위는 도덕적으로 불선할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내생의 행복을 바라고 보시를 행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부자가 되기 위해 사기를 치고 강도짓을 할 것입니다.
빨리어 깜마(kamma)의 동의어는 상카라(saṅkhāra)입니다. 상카라는 세 종류인데 생각으로 짓는 상카라, 말로 짓는 상카라, 몸으로 짓는 상카라가 있습니다. 그리고 상카라는 의도(cetanā)를 전제로 합니다. 의도의 기능은 무언가를 생각해내고, 하도록 부추기는 것으로서, 모든 행위의 주요 동기가 됩니다. 의도는 살생이나 보시 등의 행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수행자는 관찰을 통해서 의도의 본성을 경험으로 압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행위(상카라)에는 선업의 과보를 낳는 (1) 공덕이 되는 행위(puññā-abhisaṅkhāra)와 악업의 과보를 낳는 (2)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 (apuññā-abhisaṅkhāra), 그리고 부동선(不動禪)을 뜻하는 선한 무색계선(arūpa-jhāna)에 이르는 (3) 흔들림 없는 행위(aneñja-abhisaṅkhāra)의 세 가지가 있습니다. 색계 선(rūpa-jhāna)과 욕계에서 업보를 받는 욕계 선행(kāmā-vacara-kusala)을 모두 공덕이 되는 행위(puññā-abhisaṅkhāra)라고 합니다.
공덕(puñña)이라는 말은 깨끗이 하는 것, 또는 정화하는 것을 뜻합니다. 비누로 몸에 있는 때를 씻어 내는 것처럼, 우리는 보시. 지계. 수행을 통해 업의 더러움을 제거해야 합니다. 이러한 선행은 현생과 내생에 행복과 번영을 가져다줍니다.
공덕의 또 다른 의미는 선행을 한 사람의 소원을 성취하게 하는 경향성입니다. 선행은 건강, 장수, 부귀 등 다양한 소원을 성취하도록 도와줍니다. 만약 열반에 대한 소원으로 선행을 하였다면 이 선행으로 인해 열반을 얻을 수 있는 삶으로 가거나, 마지막 생에 이르기 전까지 행복과 안녕을 보장받습니다.
업 지음(abhisaṅkhāra)은 행복을 얻기 위해 무언가를 하는 노력입니다. 이는 선하거나 불선한 과보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공덕이 되는 행위(puññā-abhisaṅkhāra)는 선업의 과보를 가져오는 선행입니다. 욕계의 선행(kāmā-vacara-kusala)에는 여덟 가지가 있고 색계의 선행(rūpa-vacara-kusala)에는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선행은 보시, 지계, 수행의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보시를 하는 것은 업의 과보가 대단히 큰 선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보시자는 보시를 하기 전이나 보시를 하는 동안이나 보시를 하고 난 후에 기뻐해야 합니다. 경전에 따르면 이러한 보시는 엄청난 업의 과보를 받은 것입니다.
보시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평온(upekkhā)의 상태일지라도, 보시자의 마음이 깨끗하다면 이 보시행은 매우 큰 업의 효력을 지닙니다. 업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 보시행은 합리적인 것으로 탐욕, 성냄, 무지의 성향(carita)이 없는 재생의 과보를 받을 것입니다.
도덕적 가치에 대한 인식이나 업의 과보에 대한 믿음과 관련이 없는 보시행도 선하기는 하지만, 지혜가 결여된 것입니다. 이런 보시는 살아가면서 보시행에 대한 선한 과보는 받겠지만, 다음 생에 도(道)를 얻을 수 있을 만큼의 지혜를 갖추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권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선한 행위를 할 것이며, 또 어떤 사람은 남의 부추김을 받아서 선한 행위를 할 것입니다.(sasaṅkhārika-kusala) 이러한 두 종류의 선한 행위 중에 자발적으로 한 선한 행위가 더 큰 과보를 받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선한 행위 네 가지를 마지막 두 가지 측면에서 보면 우리는 모두 여덟 가지 욕계의 선한 마음(kāmā-vacara-kusala-cittā)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선한 행위를 할 때마다 우리는 이들 선법(kusala-dhamma) 중의 하나에 의해 유발되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집중과 명상을 할 때, 우리는 이런 여덟 가지 선법을 가지고 시작해야 합니다.
만약 선에 이르게 하는 것이 수행(bhāvanā)이라고 한다면, 수행자가 삼매를 잘 계발하면 색계 선(rūpa-vacara-jhāna)을 얻습니다. 선이란 대상에 오롯이 집중된 마음인 심일경성(心一境性cittassa-ekaggatā)을 뜻합니다.
사마타 선(samatha-jhāna)은 순일하게 고요한 상태를 얻기 위해 집중을 합니다. 선 삼매(jhāna-samādhi)는 바람이 불지 않는 허공에서 타오르는 불꽃과 같습니다. 경전에 의하면 색계 선에는 네 가지가 있고, 아비담마에서는 색계선을 다섯 가지로 나누고 있습니다.

PA¿ICCASAMUPPÆDA 12
12. UNWHOLESOME KAMMAS
Opposed to puññæbhisa³khæra is apuññæbhisa³khæra or unwholesome kamma formations.
These immoral deeds lead to lower worlds and evils in human life such as ugliness, infirmities and so forth. They number twelve in terms of consciousness, viz, eight rooted in greed (lobha), two rooted in ill- will (dosa) and two rooted in ignorance (moha).
The lobha-based dhammas comprise four with wrong belief and four without it. Of the four dhammas with wrong belief, two are joyful, spontaneous (asa³khærikha) dhamma and joyful but unspontaneous (sasa³khærika) dhamma. The neutral (upekkhæ) unwholesome dhammas may be classified in the same way. Likewise there are two joyful, lobha-based dhammas without wrong belief and two lobha-based dhammas without joy and wrong belief. Every kamma is characterized by one of these eight lobha-based dhammas. The dosa-based dhamma is of two kinds, viz, spontaneous kamma and unspontaneous kamma, This dosa-based consciousness is the mainspring of anger, dejection, fear and revulsion.
The two kinds of moha-based consciousness are doubt (vicikicchæ) and restlessness (uddhacca). The former concerns doubts about the Buddha, Dhamma, Sa³gha, søla, samædhi, the idea of a future life and so forth. The latter refers to the person who is distracted and absent-minded.
The mind is seldom calm and it usually goes wandering when it is not restrained through the practice of bhævanæ. It is said, however, that uddhacca does not lead to the lower worlds. The other eleven unwholesome dhammas do so under certain circumstances and even in case of a good rebirth they usually have kammic effects such as sickliness. These twelve kinds of unwholesome volition (cetanæ) are called apuññæbhisañkhæra.
All over the world people wish to be happy and so they strive for their material welfare in the present life and hereafter. But it is greed and ill-will that largely characterize their activities.
Wholesome consciousness is confined to those who have good friends, Who have heard their dhamma and who think rationally.
Some go morally astray, being misled by their selfish teacher. In the lifetime of the Buddha a lay Buddhist abused good monks and so, on his death he became a peta in the latrine of the monastery he had donated to the Sa³gha. He told the elder thera Moggallæna about his misdeed when the latter saw him with his divine eye. What a terrible fate for a man who had materially supported the Sa³gha for his welfare in afterlife but was misguided to the lower world by his teacher. This shows that the person whose company we seek should possess not only deep knowledge but also good character.
The mark of a good man is abstinence from any act, speech or thought that is harmful to other people. Those who keep company with good men or good bhikkhus have the opportunity to hear the good dhamma and if he thinks wisely his thoughts will lead to wholesome kamma. On the other hand evil teachers or friends, false teachings and improper thoughts may lead to moral disaster. Some who bore unblemished character in the beginning were ruined by corrupt thoughts. They were convicted of theft, robbery or misappropriation and their long standing reputation was damaged once and for ever. All their suffering had its origin in the illusion of happiness. Contrary to their expectations, they found themselves in trouble when it was too late. Some misdeeds do not produce immediate kammic results but they come to light in due course and lead to suffering. If retribution does not follow the evil-doer here and now, it overtakes him in afterlife as in the case of the donor of the monastery who became a peta for his evil words. His teacher who had misguided him fared worse after his death. For he occupied a place below his former pupil and had to live on his excreta. The kammic result of his misdeed was indeed frightful. He had committed it for his own end but it backfired and he had to suffer terribly for it.
Some jungle tribes make animal sacrifices to gods for good harvest, security, etc. These primitive beliefs still prevail among some urban people. Some worship the chief nat as if he were the Buddha. Some kill animals to feed guests on the occasion of religious alms-giving. Even some ignorant Buddhists have misgivings about this practice. Whatever the object of the donor, killing has bad kammic result and it is not a good deed despite the belief of the killer to the contrary.
A good deed bears the mark of moral purity. Killing or hurting a living being cannot be morally pure in any sense if you identify yourself with the victim. He faces death or endures illtreatment only because he cannot avoid it. He will surely retaliate if he is in a position to do so. Some people pray for vengeance and so the killer is killed in his next existence or he has to suffer in hell for his misdeed. The Pi¥aka abounds in many instances of the kammic consequences of killing.
Some long for human or deva life and devote themselves to dæna, søla and bhævanæ. Their good deeds serve to fulfil their wishes and lead to welfare in afterlife but every life is subject to old age and death and human life is inextricably bound up with ill-health and mental suffering. Some crave for the Brahmæ-world and practise jhæna. They may live happily for many kappas (worldsystems) as Braha mäs. But when life has run its course, they will be reborn as human beings or devas and any evil deed that they do may bring them to the lower worlds. After all the glorification of the Brahmæ- life is an illusion.
The illusion of happiness is not confined to common people. The illusion (vipallæsa and avijjæ) that makes us regard dukkha as sukha lingers at the first two stages of the holy path and even at the anægæmi stage the yogø still mistakes material life (rþpa-bhava) and immaterial life (arþpabhava) for a life of bliss. So the object of the Ariyas at the first three stages is to do good. As for the common people they are mired in all the four illusions that make them regard the impermanent as permanent, the dukkha of næmarþpa as sukha, the impersonal as personality (atta) and the unpleasant as pleasant. Associated with these illusions are the four avijjæs. Because of these misconceptions and ignorance every bodily, verbal or mental action gives rise to good or bad kamma. A good kamma arises only from volitional effort coupled with faith, mindfulness and so forth. If the mind is left to itself, it is likely to produce bad kamma.

12. 불선업
공덕이 되는 행위(puññā-abhisaṅkhāra)의 반대는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apuññā-abhisaṅkhāra)입니다. 이러한 부도덕한 행위로 악처(apāya)에 태어나기도 하고, 사람으로 태어나도 용모가 추하거나 병약한 몸을 갖게 됩니다.
이들 불선한 마음(akusala-citta)은 모두 열두 가지인데 탐욕에 뿌리박은 마음(lobha-mūla-citta) 여덟 가지, 성냄에 뿌리박은 마음(dosa-mūla-citta) 두 가지, 어리석음에 뿌리박은 마음(moha-mūla-citta) 두 가지, 이렇게 모두 열두 가지입니다.
탐욕에 뿌리박은 불선한 마음(법)은 사견과 결부된 네 가지와, 사견과 결부되지 않은 네 가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견과 결부된 네 가지 마음(법)가운데 두 가지는 ‘기쁨이 함께하고 자극받지 않은 마음(asaṅkhārika-citta)’과 ‘기쁨이 함께하고 자극받은 마음(sasaṅkhārika-citta)’입니다.
‘평온(upekkhā)이 함께하는 불선한 마음’도 위와 같이 분류할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쁨이 있고 사견이 없이 탐욕에 뿌리를 둔 마음’이 두 가지이고, ‘기쁨과 사견이 없이 탐욕에 뿌리를 둔 마음’이 두 가지입니다.
모든 업은 이 여덟 가지의 탐욕에 뿌리박은 마음(법) 중 하나로 특징지을 수 있습니다. 성냄에 뿌리박은 마음(dosa-mūla-citta)은 ‘자극이 있는 업’과 ‘자극이 없는 업’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성냄에 뿌리박은 마음은 화냄, 낙담, 두려움, 혐오의 근원입니다.
두 가지 어리석음에 뿌리박은 마음은 의심(vicikicchā)과 들뜸(uddhacca)입니다. 의심이란 불, 법, 승, 지계, 삼매, 내생 등에 대해 의심하는 것입니다. 들뜸은 심난하고 얼빠진 사람을 가리킵니다. 수행을 해서 제어하지 않으면 마음은 좀처럼 고요해지지 않고 보통 이리저리 방황합니다.
그러나 들뜸이 악처로 떨어지게 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들뜸 이외의 다른 열한 가지 불선업은 어떤 경우에는 악처로 이끌고,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경우에도 병약함과 같은 나쁜 업의 과보를 받게 합니다. 이 열두 가지의 불선한 의도(cetanā)를 일러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apuññā-abhisaṅkhāra)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지길 바라기 때문에 현생과 내생에서 물질적 복리를 증진시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을 특징짓는 것은 대체로 탐욕과 성냄입니다. 선한 마음은 좋은 친구를 사귀고 법을 들으며 합리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일어납니다.
이기적인 스승에게 잘못된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타락합니다. 부처님 당시에 한 재가신자가 선한 비구를 헐뜯었는데 죽어서 자신이 생전에 보시한 승원의 변소에 사는 아귀가 되었습니다.
그 아귀는 하늘 눈[天眼]으로 자기를 알아본 목갈라나(Mahā-Moggalāna)존자에게 자기가 지은 악업을 말씀드렸습니다. 내생의 행복을 위해 물질적으로 승가(saṅgha)에 보시했지만 스승에 의해 잘못된 지도를 받은 사내의 운명은 얼마나 끔찍합니까! 이 이야기는 우리가 찾아야할 스승은 학식뿐 아니라 선한 기질도 함께 지녀야 함을 보여줍니다.
선한 사람의 특징은 남을 해롭게 하려는 행동, 말,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선한 사람이나 선한 비구와 사귀는 사람은 좋은 법을 들을 기회가 생기고, 만약 현명하게 생각하면 그의 마음은 선한 업으로 이어집니다. 반면에 못된 스승이나 친구, 그릇된 가르침과 부적절한 사유는 도덕적 붕괴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처음엔 결점 없는 성품을 지녔지만 타락된 사상으로 무너집니다.
이들은 도둑질, 강도, 횡령 등으로 유죄판결을 받아, 오랜 동안 쌓아온 명성이 순식간에 무너집니다. 이 모든 고통은 행복에 대한 전도된 인식에서 비롯합니다. 기대와는 반대로 곤란에 봉착해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습니다.
어떤 악행은 즉각적인 과보가 생기지는 않지만, 때가 되면 과보가 무르익어 고통에 빠지게 합니다. 만약 현생에서 악을 행한 자에게 업의 과보가 생기지 않는다면, 아귀가 된 승원 보시자의 경우처럼 내생에는 반드시 과보를 받습니다.
재가신자를 잘못 지도했던 스승은 죽은 후 운명이 더 비참했습니다. 자기 제자의 아랫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그 제자의 똥을 먹으며 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악업의 과보는 참으로 무시무시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저지른 행위의 과보가 거꾸로 자기를 덮쳐서 무시무시한 고통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밀림의 어떤 부족은 풍작과 안전 등을 기원하며 신에게 동물을 제물로 바칩니다. 이러한 원시적인 믿음은 도시에 사는 일부 사람들에게도 아직 남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유력한 낫(Nat)을 부처님처럼 숭배합니다.
또 종교적인 공양의식에서 동물을 잡아서 손님을 접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평범한 불교신자들도 이러한 관습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품고 있습니다. 보시하는 사람의 목적이 무엇이든 살생은 나쁜 업보를 받으며, 살생을 한 사람이 믿는 바와는 반대로 선한 행위가 아닙니다.
선한 행위는 도덕적인 청정을 특징으로 합니다. 희생자와 처지를 바꿔놓고 볼 때 생명체를 죽이거나 다치게 하는 행위는 어떠한 의미로도 도덕적으로 청정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피해자는 어쩔 수 없이 죽음과 학대를 당해야 합니다.
피해자가 만일 보복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면 반드시 보복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복수를 기원하며, 살생을 저지른 자가 내생에 죽임을 당하거나 악행으로 인해 지옥에서 고통을 받습니다. 경장(經藏)에는 살생의 과보에 대한 일화가 많이 나옵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이나 천신으로 태어나기를 바라며 보시, 지계, 수행에 힘씁니다. 물론 자기가 지은 선한 행위로 인해 바라던 바가 이루어져 내생에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늙고 병들고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운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범천계에 가기를 갈망하여 선정을 닦습니다. 이들은 범천이 되어 여러 겁에 걸쳐 행복하게 살 것입니다. 그러나 수명이 다하면 인간이나 천신으로 다시 태어나고, 만일 악업을 지었다면 악처에서 태어날 것입니다. 결국 범천이 누리는 영광된 삶이란 것도 단지 전도된 인식일 뿐입니다.
행복이라는 환상은 범부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여기도록 하는 전도(顚倒,vipallāsa)와 무명(avijjā)은 성스러운 도의 첫째와 둘째 단계(예류와 일래)에서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으며, 불환도에 들어서도 수행자는 색계의 존재(色界有 rūpa-bhava)와 무색계의 존재(無色界有 arūpa-bhava)를 삶의 지복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 단계(예류, 일래, 불환)에 들어선 성자들은 선한 행위를 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합니다.
범부의 경우에는 무상을 항상한 것으로, 정신-물질의 괴로움을 행복으로, 무아를 자아로, 괴로운 것을 즐거운 것으로 여기는 네 가지 전도(vipallāsa-saññā 常樂我淨 4가지)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이러한 전도와 결부된 것이 네 가지 무명입니다. 이러한 전도와 무명으로 인하여 몸, 말, 생각으로 짓는 모든 행위는 선하고 불선한 업을 일으킵니다. 선업은 믿음, 알아차림 등과 함께 의도적인 노력이 있을 때 생겨납니다. 마음을 그냥 내버려두면 악업을 짓기 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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