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tusBuddha.net - Cyber Buddhist Forum

news and article

* 잦은 질문    * 찾기

현재 시간 2018-01-19, (금) 6:22 pm

댓글없는 게시글 보기 | 진행 중인 주제글 보기

모든 시간은 UTC + 9 시간 으로 표시합니다

새 주제 게시글 주제글에 댓글 달기  [ 1 개의 게시글 ] 
글쓴이 메세지
 게시글 제목: (Mahāsi Sayādaw)34 korean
전체글올린 게시글: 2015-12-30, (수) 12:07 am 

가입일: 2015-01-30, (금) 10:13 pm
전체글: 103
34. 난해한 연기법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기법은 결과, 원인, 가르침과 경험적인 지혜인 꿰뚫음(paṭiveda)129의 측면에서 볼 때 난해합니다.
...................
129. 주석서에서는 불교 혹은 법(Dhamma)을 교학(pariyatti), 수행(paṭipatti), 통찰(paṭivedha, 꿰뚫음)의 세 가지 측면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교학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이 기록된 삼장(Tipiṭaka)을 공부하는 것이고 수행이란 계• 정• 혜 삼학을 닦는 것이며, 통찰이란 출세간도를 통찰하고 성스러운 과를 증득하는 것이다. 배움은 도 닦음의 토대가 되고, 도 닦음은 통찰의 토대가 되며, 교학은 수행의 지침이 되고, 수행은 성위를 증득하는 돌파구가 되는 것이다.
...................
먼저, 무명과 다른 원인의 결과로서의 상카라를 이해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신과 물질에서 생기는 괴로움을 행복이라고 잘못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위자(avijja)로, 사람들은 이를 전도된 무명으로 알지 못합니다.
생각하는 것은 실재하는 자아라고 믿고 업형성력인 상카라(saṅkhāra)가 무명의 결과라는 것을 모르며, 노력하는 것은 자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무명의 결과로서의 선업과 불선업을 알기 어렵습니다.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전생의 상카라와 현생의 재생연결식사이의 인과관계입니다. 마찬가지로 정신-물질[名色]과 여섯 감각장소[六入] 등이 식(識)에 의해서 조건 지어진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파악하기 어려운 것은 연기에 포함되어 있는 원인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기 운명을 스스로 만들어간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이나 범천이 자신을 창조했다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모든 것은 우연히 발생한다고 주장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존재의 주요원인으로서의 무명을 알지 못합니다.
또한 연기에 대한 부처님의 어떤 가르침은 무명(無明)에서 시작해서 죽음으로 끝납니다. 다른 가르침은 역순으로 전개됩니다. 또 어떤 가르침은 12연기 사슬의 중간고리에서 시작해서 처음이나 끝으로 전개됩니다. 연기법의 이러한 다양한 설명은 그것을 더욱 더 이해하기 어렵게 합니다.
연기법에 대한 통찰지를 얻으려면 실제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인과관계의 사실을 체험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이렇게 연기를 위빠사나로 접근하여 공부하는 것은 반드시 올곧아야 할 수 있으니 방법상 결코 쉬운 것이 아니며 꾸준하고 철저하게 수행해야만 합니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아난다 존자에게는 남다른 특성이 있기 때문에 연기법이 명확해보였습니다. 그러므로 “아난다야, 그렇게 말하지 말거라.”라고 하신 부처님의 말씀은 암묵적인 칭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석서에 따르면 부처님의 말씀은 간접적인 나무람일 것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실제로는 이런 뜻일 것입니다. “아난다야, 너는 연기법이 이해하기 쉽다고 했다. 그런데 너는 왜 내게서 가르침을 받고 나서야 예류자가 되었느냐? 왜 아직 도의 첫 단계보다 더 높은 어떠한 단계도 얻지 못했느냐? 너는 자신의 단점을 생각해야 한다.
너는 보통의 제한적인 지혜를 지닌 내 제자이고, 네가 말하는 것은 나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런 말은 너와 같은 시자가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는 이 연기법을 알기 위해 수없는 겁 동안 지혜를 계발해야 했기 때문에, 너는 이 연기법을 가볍게 말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몇 마디로 아난다를 암묵적으로 꾸짖으신 부처님께서는 연기법의 심오함을 이렇게 강조하셨습니다. “아난다야, 이 연기법은 참으로 심오하다. 이 법칙을 깨닫지 못하고 꿰뚫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실에 꿰어진 구슬처럼 얽히게 되고 베짜는 사람의 실타래처럼 헝클어지고 문자 풀처럼 엉키어서 악처, 지옥, 윤회를 벗어나지 못한다.”
다른 말로 하면, 식(識), 정신-물질[名色] 등이 무명과 상카라[行]를 조건으로 일어난다는 이 법칙은 대단히 심오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직 원인과 결과의 관계만 있을 뿐이며 영원한 존재는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수태의 순간부터 생명이 영원한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과 이 존재 뒤에 성장하는 어떤 영원한 실체가 있다고 믿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존재의 핵심인 영혼이 수많은 전생을 계속 살아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모든 전도된 인식은 연기법의 근저에 있는 실재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됩니다.
중생의 행위와 말과 생각은 명백히 사성제(四聖諦)와 연기를 모르는 무명에서 비롯합니다. 선한 행위는 선한 결과를 가져오고 불선한 행위는 불선한 과보를 가져오며, 모든 중생은 자신의 행위에 상응하는 과보를 받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무명은 업(kamma)이나 상카라(saṅkhāra)에 이르고 그 결과 태어남[再生]과 식 등이 생깁니다. 지혜로운 사람에게 이 사실은 명백합니다.
중생들은 연기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끊임없이 방황하면서 윤회에서 헤어나지를 못합니다. 중생들은 대부분 악처에 떨어지며 선업의 힘으로 가끔씩 천신계에 태어납니다. 그리고 선업의 공덕이 다하면 다시 악처로 되돌아갑니다.
악처 중생들이 인간계나 천신계에 태어나는 것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임종의 순간에 선행에 대한 기억이나 표상이 떠오를 때에만 선처에서 태어나는 것이 가능한데 악처 중생으로 있으면 선행 자체를 떠올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축생계에서는 서로 죽고 죽이는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기 때문에 사랑, 연민이나 기타 영적인 가치가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들은 대개 고통과 두려움에 휩싸여 죽게 됩니다. 그러므로 악처 중생들은 악처에서 다시 태어날 확률이 높습니다.
연기를 알지 못하는 무명 때문에 중생은 윤회에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그는 마치 절구에 묶여 있는 소와 같습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돌고 또 돌아도 소는 움직일 수 있는 범위에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사람은 대개는 악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윤회 속에 허우적거리며 수많은 겁(劫)동안 재생을 되풀이합니다.
연기를 이해하는 것은 사성제를 이해하는 것과 함께 영적인 해탈에 필수불가결한 것입니다. 사실 사성제는 연기와 동의어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목적은 이 가르침에 대한 통찰지를 지혜와 체험으로 얻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가르침은 심오하고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심지어는 위빠사나 수행에서도 무명과 상카라 등에 대한 분명한 개념을 갖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위없는 깨달음을 얻기 전과 얻고 난 뒤에 연기를 숙고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7일 동안 해탈의 즐거움(vimutti-sukha)을 누리고 계시다가 일곱째 날 밤에 인과관계, 즉 조건(paccaya)의 관점에서 연기를 관찰하셨습니다.
인과관계의 사슬에서 첫째 사슬에 대해서 설명했으니 지금부터는 여섯 감각장소[六入]을 조건으로 일어나는 감각접촉[觸]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여섯 감각장소[六入]란 눈[眼], 귀[耳], 코[鼻], 혀[舌], 몸[身], 마노[意]의 여섯 감각기관과 형상[色], 소리[聲], 냄새[香], 맛[味], 감촉[觸], 마노의 대상[法]의 여섯 감각대상[六境]을 뜻합니다. 감각기관과 그에 해당하는 감각대상 사이의 접촉을 감각접촉(觸 phassa)이라고 합니다.
감각접촉[觸]은 감지하기 어려운 정신적 생명의 현상이지만 대상이 마음에 확실한 충격을 주었을 때에는 그것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학대받고 있는 것을 보면 충격을 받습니다.
나무 위에 어떤 사람이 목매어 죽은 것을 보면 부들부들 떱니다. 유령을 보면 등골이 오싹해질 것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거나 읽으면 강력한 인상이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은 마음에 감각대상과의 맞부딪침인 감각접촉[觸]이 있을 때 벌어지는 현상을 뜻합니다.
감각접촉[觸]은 때때로 매우 폭발적이며 폭발적 감정과 욕정, 분노 등을 표출하게 합니다.『증지부경』주석서에는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고대 스리랑카의 둣타가마니(Duṭṭhagāmaṇi) 왕 때 한 젊은 비구가 소녀를 쳐다보게 되었습니다. 소녀도 비구를 쳐다보았고, 그 둘은 불타는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고 급기야 죽게 되었습니다. 또 어떤 장로 비구도 마하나가(Mahā-nagā)왕의 왕비를 알아차림 없이 쳐다보았다가 미친 일도 있습니다.
「무둘락카나 본생경(Mudulakkhaṇa jātaka)」(J.66)에 따르면 보살은 선인(仙人)이었는데 공양을 받기 위해 왕궁으로 갔습니다. 선인은 신통이 있었기 때문에 날아서 갔는데 선인이 갑자기 나타나자 왕비가 급하게 일어나는 바람에 걸치고 있던 옷이 흘러내렸습니다. 왕비의 매혹적인 몸매는 곧바로 오랫동안 잠재하고 있던 선인의 성욕을 솟구치게 했습니다. 선인은 음식을 전혀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신통도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걸어서 거처로 돌아간 선인은 욕정과 애욕의 불꽃으로 괴로워하며 누워 있었습니다.
사건의 전모를 들은 왕은 언젠가는 이전의 높은 본성을 되찾을 성자의 능력을 확신했기 때문에 선인에게 왕비를 바쳤습니다. 그리고는 왕비에게 선인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고 은밀히 지시했습니다.
선인은 왕비를 데리고 왕궁을 떠났습니다. 일단 왕궁 문을 나오자 왕비는 선인에게 되돌아가서 왕에게 집을 요구하라고 하였습니다. 낡은 집을 받았지만 똥과 오물을 치우기 위한 광주리 및 손도끼를 가지고 와야 했습니다. 선인은 몇 번이고 필요한 다른 물건들을 요구하러 왕에게 가야 했습니다. 왕비의 요구대로 여기저기 다니면서 집안의 허드렛일을 하느라고 기진맥진 했지만, 선인은 아직도 욕정과 애욕에 사로잡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시킨 일을 모두 다 한 다음에 선인은 좀 쉬려고 왕비 곁에 앉았습니다. 그러자 왕비는 선인의 수염을 확 잡아당기면서 말했습니다. “당신은 애욕과 욕망을 없애는 것이 목적인 사문(沙門)이라는 사실을 모르시나요? 왜 그렇게 정신을 못 차리세요?” 이 말에 정신이 번쩍 든 선인은 자신의 어리석음과 무명을 알아차렸습니다. 왕비를 왕에게 돌려준 다음 히말라야의 숲으로 가서 위빠사나 수행을 하여 신통도 회복하고 죽어서 범천계에 이르렀습니다.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보살과 같이 정신적으로 뛰어난 존재도 번뇌의 불길을 피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선인은 전에도 왕비를 우연히 보았겠지만 감정을 뒤집어놓을 정도로 감각접촉[觸]이 강력하지는 않았습니다. 선인이 며칠 동안 욕정과 애욕의 불길에 휩싸이는 고통을 받은 것은 바로 왕비의 육체적인 형상에 대한 분명하고 생생한 감각접촉[觸] 때문이었습니다.
「움마단띠 본생경(Ummādantī jātaka)」(J.527)에서 시위(Sivi)왕은 사령관의 아내인 움마딘띠(Ummādantī)를 본 다음에 거의 미칠 지경이 되었습니다. 움마단띠는 미모로 이름을 날렸기 때문에 왕은 바라문 고문관을 보내어 그녀가 왕비의 자질이 있는지를 알아보게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움마단띠를 보자마자 미모에 매혹되어 자제를 못하고 그들을 위해 베푼 잔치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바라문들의 문란한 행동에 넌더리를 낸 움마단띠는 그들을 집밖으로 내쫒았습니다. 심술이 난 바라문들은 왕비의 자질이 없다고 왕에게 보고했습니다.
왕은 움마단띠에 대한 관심이 없어졌고 그녀는 사령관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움마단띠는 자신에 대한 왕의 생각을 바꾸어 놓겠다고 결심하고 왕이 축제 기간 동안 성내를 시찰할 때 자신의 미모와 매력을 최대한 보여줬습니다.
왕은 움마단띠에게 반해서 거의 정신을 잃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잠을 이룰 수 없게 된 왕은 움마단띠에 대해 미친 사람처럼 헛소리를 해대면서 제석이 은혜를 베풀어서 움마단띠와 하루나 이틀 밤을 같이 잘 기회를 주었으면 좋겠다는 게송으로 자신의 맹목적인 열정을 발산했습니다.
감각대상과의 맞부딪침은 대상이 전달하는 감각접촉[觸]의 본성에 대부분 좌우됩니다. 감각접촉[觸]이 불분명하고 흐릿하면 부드러운 느낌과 갈애를 만들어 낼 뿐이지만 분명하고 생생한 감각접촉[觸]의 뒤에는 더 많은 느낌과 갈애 등이 따라옵니다.
감각접촉[觸]으로 인해 감정이 폭발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적대적인 대상을 보면 분노하고 무서운 대상을 보면 두려워합니다. 불쾌한 말은 우리를 짜증나게 합니다. 자아를 북돋는 것을 생각하면 자만심이 생깁니다.
영혼이 있다는 생각이나 업과 그 과보를 비웃는 가르침을 들으면 그릇된 견해를 갖습니다. 부러운 대상은 부러워하게 만들고, 자기만 갖고 싶은 대상은 우리를 인색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불선업을 조장하는 감각접촉[觸]의 예입니다.
선업도 감각접촉[觸]에서 생깁니다. 예를 들면 신앙의 대상은 믿음을 생기게 하고 용서해야 하거나 인내해야 할 사람들은 우리의 인욕을 길러주고 부처님과 아라한을 계속해서 생각하면 알아차림이 강해지고 자비로워집니다.
그래서「무애해도」에는 “감각접촉[觸]을 조건으로 50가지 마음부수들이 생긴다.”라고 설명합니다.「무애해도」는 느낌[受], 인식[想], 업형성력인 상카라의 원인을 이 감각접촉[觸]에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감각접촉[觸]이 있기 때문에 볼 수 있으며 이 감각접촉[觸]은 눈[眼]과 형상[色]과 안식(眼識)이 있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안식(眼識)과 형상[色]을 구분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안식(眼識)과 형상[色]을 혼동하는 경향이 있지만 부처님은 안식(眼識)은 눈[眼]과 형상[色]에서 일어나며 감각접촉[觸]은 눈[眼]과 형상[色]과 안식(眼識)의 결합을 뜻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결합이 바로 봄의 감각접촉[眼觸]으로, 눈[眼], 형상[色], 안식(眼識)의 세 가지가 맞부딪침으로써 필요충분조건을 이룹니다. 사념처 수행자는 감각접촉[觸]의 본성을 체험으로 깨닫습니다. 수행자는 보는 매 순간마다 “봄, 봄”하고 주시하고 그로써 집중이 계발되면 봄이란 원인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 또는 누군가가 만들어졌거나 창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다시 말하면 봄은 눈[眼]과 형상[色]을 원인으로 하고 안식(眼識)을 그 결과로 하는 정신과 물질의 현상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감각접촉[觸]은 감각대상의 본성에 따라서 즐겁거나 괴롭거나 무덤덤한 느낌을 생기게 합니다. 대상이 아름다우면 즐거운 느낌이, 못생겼으면 괴로운 느낌이, 못생기지도 사랑스럽지도 않으면 무덤덤한 느낌(upekkhā-vedanā)이 됩니다.
이 무덤덤한 느낌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생각이 들지 않고 심지어는 느낌으로 인지되지도 않지만 자아에게는 수용됩니다. 사실상 이 세 가지 느낌들은 자아나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감각접촉[觸]에서 생기는 정신적 과정의 측면입니다.
연기법을 이해한다는 것은 회의주의와 전도된 인식에서 벗어남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벗어남은 예류과를 얻은 수행자에게 꼭 필요한 특성이고 연기법을 이해하는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연기법에 대한 무명은 부처님, 법, 승가에 대한 의심을 일으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의심에는 다음과 같은 여덟 가지가 있습니다.
(1) 부처님에 대한 의심입니다. 이것은 “부처님은 실제로 모든 번뇌에서 벗어난 분이었을까? 아니면 제자들에게 맹목적으로 믿도록 한 보통사람이 아니었을까?”와 같은 의문을 회의주의자로 하여금 제기하게 합니다.
(2) 가르침에 대한 의심입니다. “도와 열반은 진정으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소멸을 보장하는 것일까?”
(3) 승가에 대한 의심입니다. “진정으로 번뇌에서 벗어난 성자(ariya)들은 있는 것일까? 전도된 인식과 의심을 극복한 예류자는 절대 악처에 태어나지 않는 것일까? 감각적 욕망과 성냄이 희미해진 일래자가 있는 것일까? 감각적 욕망과 성냄에서 완전히 벗어난 불환자가 있는 것일까? 모든 번뇌에서 벗어난 아라한은 있는 것일까?”
(4) 수행에 대한 의심입니다. “계를 지키고 관찰하는 수행은 더 높은 영적인 진보에 유익하고 도움이 되는 것 일까?”
(5) 과거에 대한 의심입니다. “나는 과거에 존재했을까? 나는 과거에 왜 그리고 어떻게 존재했을까? 나는 전생에 어떠한 사람이었을까? 나는 덩어리에서 생겨났을까 아니면 자연발생으로 생겨났을까?”
(6) 미래에 대한 의심입니다. "나는 죽고 나서 존재할 것인가? 내생에 나는 어떠한 사람이 될 것인가?"
(7) 과거와 미래 모두에 대한 의심입니다. 복주석서에 따르면 이 의심은 삶의 수레바퀴의 과거와 미래 가운데서 현재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이 해석은 다음과 같은 빨리 성전의 말씀과 일치합니다. “이 현생에서 자아에 대한 의심이 생긴다.” 그러한 의심에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길 수가 있습니다.
“나는 진정 나 자신인가? 자아는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만약 자아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어떤 종류의 자아인가? 그것은 큰가, 작은가? 왜, 어떻게 자아가 존재하는가? 그것은 창조되었는가? 자연발생으로 생겨났는가? 자아는 어디서 왔으며 마지막에 몸이 무너지고 난 다음에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은 과거에 대한 다섯 가지 의심, 미래에 대한 다섯 가지 의심, 현재에 대한 여섯 가지 의심을 나타냅니다. 수행자가 자아나 나에 대한 모든 전도된 인식에서 벗어나게 될 때 이러한 모든 의심들을 극복하게 됩니다. 이것을 의심을 극복함에 의한 청정(度疑淸淨 kaṅkhāvitaraṇa-visuddhi)이라고 합니다.
(8) 많은 의심이 일어나는 마지막 주제는 중생계의 인과관계의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연기법입니다. 상카라[行]는 정말 참된 법에 대한 무명(無明)에서 비롯되는 걸까? 재생은 정말로 업을 조건으로 일어나는 것일까? 정말 내생에 악업은 해롭고 선업은 유익한 것일까? 모든 현상에 정말 원인이 있는 것일까? 모든 것은 원자와 전자가 우연히 결합된 결과가 아닐까? 이러한 의심들은 연기법에서 설명하고 있는 인과관계의 사슬에서 원인 고리인 무명(無明), 상카라[行]와 그 결과 고리인 식(識)과 재생을 중심으로 펼쳐집니다.
이러한 의심은 결국 그릇된 견해를 생기게 합니다. 연기와 모순되는 그릇된 견해는 이러한 의심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자신의 지적수준을 넘어 삶의 본성에 대해 추론하면 처음에는 의심이 생기지만 나중에는 전도된 인식에 집착하는 회의주의자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한 회의주의와 그릇된 견해는 연기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됩니다. 연기법을 분명하게 이해하는 사람은 전도된 인식은 말할 것도 없고 의심도 갖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분석하면 지구, 태양, 나무 등의 무정물(無情物)이 그렇듯이 중생도 원인과 결과의 복합체입니다. 우주를 지배하는 인과법은 창조나 우연발생의 여지를 두지 않습니다.
현대 과학은 생명 없는 물질계가 원인과 결과의 상호작용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압도적인 증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생명이거나 마음이거나 물질이거나 간에, 이 세상 모든 것은 조건 지어져 있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의 진리를 확인 시켜줍니다.
부처님께서는 사람의 내적인 삶의 조건 지어진 본성을 강조하셨습니다. 물질계는 윤회가 없고 재생과 괴로움을 받지 않기 때문에 불교에서 외적인 무정물(無情物)의 세계는 관심사가 아닙니다.
불교의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중생입니다. 중생을 이루고 있는 정신• 물질은 수없이 많은 생을 거치면서 대부분 악처에서 괴로움을 겪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신• 물질의 과정을 이해하고 지혜롭게 행동한다면 해탈에 이르는 도에 점점 전진해 나갈 것입니다. 설령 아직 해탈하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윤회에서 더 좋은 삶과 행복한 운을 얻을 수 있습니다. 12연기를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번뇌를 완전히 소멸시키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는 상카라[行]의 원인으로써 무명과 재생의 원인으로써 업의 결과를 설명했습니다. 이제 재생연결식의 근원에 대해서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증지부』의「존재경(Bhava-sutta)」(A3:76)에서 의도를 가진 선업과 불선업을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들판에, 식(識)을 씨앗에, 갈애를 들판을 촉촉하게 하는 수분에 비유하셨습니다.130
...................
130.『증지부』주석서(AA.ii.335)는 이를 “선업과 불선업이 자라는 장소(ṭhāna)라는 뜻에서 업은 ‘들판khetta)’이다. (업과) 함께 생긴 업을 형성하는 식은 자란다는 뜻에서 ‘씨앗(bija)’이다. (씨앗을) 돌보고 자라게 하기 때문에 ‘갈애’는 물과 같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
나무를 심으려면 들판과 묘목이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재생연결식은 업이라는 기름진 들판을 전제조건으로 합니다. 업은 재생의 잠재력을 생기게 하고 앞선 식의 상태는 사라졌지만 재생의 잠재력은 정신과 밀접하게 남아 있습니다.
마치 초목이 아직 싹이 트지는 않았지만 적당한 조건이 갖추어지면 실제로 싹이 트는 것과 같고, 죄를 저지른 사람이 잠재적인 죄수와 같으며, 국영공장에서 두각을 나타낸 근로자가 그 공로를 치하하여 정부에서 주는 상의 잠재적인 수상자인 것과 같습니다.
초목이 발아하려면 씨앗에 의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재생은 선하거나 불선한 식에 의존합니다. 선한 식이나 불선한 식이 일어나고 소멸하지만 유사한 상태의 식이 끊어지지 않고 흐르도록 자극을 줍니다.
이런 작용은 뱀이 허물을 벗는 것처럼 앞선 업식의 결과입니다. 그러한 식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업(kamma)이나 업의 표상(kamma-nimitta)이나 태어날 곳의 표상(gati-nimitta)에 중심을 둔 임종할 때의 죽음의 마음(cuti-citta)입니다.
죽어가는 사람이 만나는 이러한 표상을 업형성력(saṅkhāra-kamma)을 조건으로 한 내생의 전조를 의미하는 나타남의 구족(upaṭṭhāna-samaṅgitā)이라고 합니다. 죽음의 마음이 재생연결식으로 전이됨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씨앗이 싹터 초목으로 성장하는 것과 어느 정도 유사합니다.
씨앗이 초목으로 자라기 위해서는 물이 필요합니다. 물 또는 적어도 공기 중의 습기가 없으면 씨앗은 싹이 트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업이 내생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하더라도 갈애가 없으면 재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라한의 경우는 범부들처럼 짓는 업이 있고 식이 있다는 점에서 재생의 조건이 있지만 갈애가 소멸했기 때문에 재생연결식이 생길수가 없습니다.
갈애는 아라한이 아닌 사람에게 내재해 있으며 범부에게 가장 강력합니다. 갈애는 감각대상을 즐겁고 매력적이고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게 합니다. 갈애는 즐거움, 행복, 희망이라는 전도된 인식을 일으킵니다. 갈애는 좋은 것을 기뻐하고 행복과 번영을 인생의 주목적으로 삼게 합니다.
갈애는 다른 마음 상태에 이르는 업의 마음을 자극합니다. 임종이 다가올 때 이 마음상태가 표상을 일으킵니다. 죽어가는 사람은 즐거운 표상을 보고 기뻐하며 활기가 차고 유쾌해집니다.
이것은 업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괴로운 표상들을 환영하진 않겠지만 이 표상들도 자신과 어떤 관계가 있으며 이러한 자신에 대한 집착도 업의 씨앗을 싹트게 합니다.
그러므로 보통 사람인 경우에 재생은 업, 업식과 연결되어 있는 마음과 식(citta-vinñāṇa), 갈애를 조건으로 일어납니다. 재생의 기름진 토양인 업은 임종의 표상에서 부각되고, 이러한 표상들과 죽어가는 사람이 보이는 관심으로 씨앗이 싹트는 것이 보입니다. 그래서 죽은 다음에 전생의 마지막 순간의 마음상태를 조건으로 재생연결식이 일어납니다.
재생연결식은 전 생애와 관계된 정신-물질[名色], 여섯 감각장소[六入], 감각접촉[觸], 느낌[受]과 그들 간의 상호관계를 작동하게 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재생연결식을 현생의 씨앗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재생연결식은 정신• 물질[名色]과 피할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몸 안에 있거나 바깥에 있거나 간에 모든 정신• 물질[名色]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기 때문에 괴로움입니다. 하지만 무명으로 인해 우리는 괴로움을 보지 못하고 전도된 인식과 집착을 일으키며 감각적 대상을 끊임없이 추구하고, 이로써 새로운 존재로 태어납니다.
새로운 존재의 토대인 재생연결식과 함께 그 재생연결식의 토대인 물질적인 몸과 감각접촉[觸], 느낌[受]과 같은 마음부수들이 생겨납니다. 재생연결식이 사라지면 탐욕, 분노, 만족, 인욕 등과 같은 선업이나 불선업을 촉발시키는 다른 마음 부수들이 뒤이어 일어납니다. 이 마음부수들이 이번에는 앉음, 일어섬 등의 육체적 동작들에 이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상응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을 이끄는 것은 마음(citta)131이다. 세상은 마음에 의해 끌려간다. 바로 마음이 그 모든 것 위에 있어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한다.” 여기서 세상(loka)132은 중생계를 가리킵니다. 마음은 중생을 바르거나 나쁘게 인도합니다.
...................
131. 마음[心]으로 번역되는 찟따(citta)는 대상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아비담마에사는 이 citta와 viññāṇa을 아무런 구분 없이 쓰고 있다. 굳이 구분하여 본다면 citta는 마음을 뜻하는 가장 보편적인 술어이고, viññāṇa는 여섯 감각기관[六根]과 여섯 대상[六境]이 만나서 일어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본서에서도 viññāṇa의 번역어인 conciousness를 문맥에 따라 식(識)이나 아는 마음, 또는 그냥 마음으로 옮긴다.
132. 아비담마에 의하면 세계(loka)는 다름 아닌 우리 마음에 있는 미세한 여러 계층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서 구현된 것이다. 중생들이 거주하는 세계의 계층조직은 마음의 계층조직을 그대로 복사한 것이어서 이 둘은 서로서로 상응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중생이 왜 특정한 세계에 태어났는가 하는 것은 그가 전생에 그 세계에 태어나기에 적합한 업을 산출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계(loka)와 마음(citta)은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
그리고 세계로 번역되는 loka는 ‘보이는 세상(visible world)'을 뜻한다. 여기에 대비되는 개념이 본문 뒷부분에 나오는 저 세상(para-loka)이다.
경전에서 loka는 여러 문맥에서 등장하는데 정신• 물질의 모든 영역이나 세상, 세계, 세간을 뜻한다. 그래서 광의로 해석하여 영어로는 "sphere, plane. division, order"등으로 옮기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world로 옮긴다. loka의 의미를 경에 나타나는 문맥에 따라서 몇 가지로 정리해 본다.
(1) 우주, 혹은 세계, 세상의 뜻이다. 신의 세계(deva-loka), 인간세계(manussa-loka), 범천의 세계(brahmā-loka) 등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다시 niraya-loka(지옥계), tiracchāna-loka(축생계), pittivisaya-loka(아귀계), manussa-loka(인간계), asura-loka(아수라계), deva-loka(천상계) 등의 육도(六道)로 나타납니다.
(2) 이런 세계의 개념은 「청정도론」에서 다음의 셋으로 정리되어 나타난다.「청정도론」에서는 세상 혹은 세계를 ① 형성된 것들의 세상(sañkhāra-loka) ② 중생의 세상(satta-loka) ③ 공간의 세상(okāsa-loka)의 셋으로 나눈다.
① 형성된 것들의 세상(sañkhāra-loka): "하나의 세상: 모든 중생은 음식으로 생존한다. 두 종류의 세상: 정신과 물질. 세 종류의 세상: 세 종류의 느낌. 네 종류의 세상: 네 종류의 음식. 다섯 종류의 세상: 집착의 대상인 다섯 종류의 무더기. 여섯 종류의 세상: 여섯 종류의 안의 장소[六內入]. 일곱 종류의 세상: 일곱 종류의 식(識)의 거주. 여덟 종류의 세상: 여덟 종류의 세간적인 법. 아홉 종류의 세상: 아홉 종류의 중생의 거처. 열 종류의 세상: 열 가지의 감각장소[十入]. 열 두 종류의 세상: 열 두 종류의 감각장소. 열여덟 종류의 세상: 열여덟 종류의 요소[界]"로 나누어 설명한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모든 형성된 것[有爲法]들을 세상(loka)이라 부르고 있다.
② 중생의 세상(satta-loka): 모든 중생들의 습성, 잠재성향, 행위, 성미, 그 중생이 눈에 때가 적은지 많은지, 근기가 예리한지 둔한지, 행실이 바른지 나쁜지, 유순한지 아닌지,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등등이 포함된다.
③ 공간의 세상(okāsa-loka)은 “하나의 세계는 종횡으로 각각 일천 백 2십만 3천 4백 5십 유순이다. 그 주위는, 일체의 주위는 3백6십만이 있고, 일만 3백 5십의 유순이다.”등등으로 자세히 설명되고 있다. (1)의 우주나 세계는 이 공간의 세계를 뜻한다.
물론 이 세상(iha loka), 저 세상(para-loka) 등의 개념으로도 나타나고 일체 세상(sabba-loka)으로도 나타나고 욕계, 색계, 무색계를 세간(lokiya)이라 부르고 예류도에서 아라한과까지 사향사과 혹은 사쌍팔배를 출세간(lokuttara)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렇게 다양한 문맥에서 나타나는 것이 loka의 개념이다.
...................
믿음과 계행 등을 닦는 선한 사람의 마음은 선행을 하도록 이끌 것이고 법문을 듣고 위빠사나 수행을 하게 할 것입니다. 마음은 그를 높은 중생계에 태어나게 하든지 열반이라는 목표로 인도할 것입니다. 반면에 못된 사람의 마음은 감각대상을 추구하고 악행을 하게 할 것이고 죽은 다음에 악도에 태어나서 더 큰 괴로움을 받도록 할 것입니다.
이 게송은 마음이 모든 정신-물질을 지배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는 식을 조건으로 감각접촉[觸]등의 정신-물질 현상이 일어난다는 연기의 가르침과 일치합니다. 눈에서 일어나는 감각접촉[眼觸]에 대해서는 이미 설명했으니, 이제 듣는 감각접촉[耳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보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듣는 것도 귀[耳], 소리[聲], 이식(耳識)의 세 가지를 포함합니다.
귀[耳]와 소리[聲] 없이 듣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과학자들은 음파의 속도가 초당 340M 라고 합니다. 이는 자연적인 소리의 속도이고 라디오 방송은 한 순간에 전 세계에 소리를 내보낼 수 있습니다. 소리가 귀와 맞부딪칠 때에는 거울에 비추는 것과 같이 들림이 있게 됩니다.
하지만 귀의 본래 주인이 소리를 듣는다고 생각하면 잘못입니다. 귀의 감성 물질은 끊임없는 흐름에 있으며 관련된 물질은 항상 일어나고 사라지고 있습니다. 귀의 감성 물질은 흐르는 시냇물의 바뀌고 있는 물과도 같습니다. 물질의 흐름과 음파가 맞부딪침으로써 이식(耳識)을 촉발합니다.
이식은 한 순간만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그 다음에 소리를 계속해서 받아들이는 마음과 조사하는 마음과 결정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 각각의 마음은 한 순간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그리고는 매우 빠른 속도로 일곱 개의 자와나가 연달아 일어나고 그 다음에 소리에 초점을 맞춘 두 개의 등록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런 것들이 들림에 포함된 인식과정입니다. 하나의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귀[耳]와 소리[聲]를 토대로 하여 이식(耳識)이 새로워집니다. 그래서 사념처 수행자는 들음이 귀와 소리를 조건으로 있다는 것을, 그리고 거기에는 듣는 사람이나 존재가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사실, 수행자는 볼 때보다는 들을 때 인과관계를 훨씬 더 잘 압니다.
이와 같이 들음이란 귀[眼]와 소리[聲]와 이식(耳識)의 결합을 뜻합니다. 소리의 맞부딪침이 바로 귀의 감각접촉[耳觸]이며, 명상하는 수행자에게는 아주 분명합니다. 어떤 수행자는 너무 민감한 나머지 거친 말을 들을 때 마치 그 소리가 귀를 향해 맹렬히 돌격해와 사정없이 후려치는 것처럼 느낍니다.
어떤 수행자는 낙엽이 떨어지는 소리에 깜짝 놀라기도 합니다. 귀에 들어오는 다양한 소리가운데, 듣고자 하는 소리를 골라서 귀를 기울이면 그 감각접촉은 두드러집니다. 크고 거칠고 귀청을 찢는 소리는 듣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습니다. 즐겁지 못한 대상은 안볼 수는 있어도 소리는 그렇게 무시해 버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듣는 즐겁거나 괴로운 소리에 따라서 우리는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을 갖습니다. 노래와 감미로운 목소리는 귀에 들리는 것을 환영하지만 거친 소리와 욕설은 듣기 싫습니다. 평범한 소리를 들을 때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듭니다. 그런 경우에는 우리의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무덤덤한 느낌(upekkhā-vedana)은 너무나도 미세하여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사실 아비담마 논서에는 안식(眼),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을 가질 때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이 생기는 것을 부정하고 오직 무덤덤한 느낌(upekkhā-vedana)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수행자에게 안식 등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하는 것은 권할 만하지 않습니다.
수행자는 즐거운 느낌과 함께 조사하는 마음(santīraṇa-citta), 등록하는 마음(tadārammaṇa-citta)과 같은 몇 개의 심찰나와 괴로운 느낌과 함께 자와나(javana)를 포함하는 전체 인식과정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게다가 안식 등이 일어나는 순간에 무덤덤한 느낌(upekkhā-vedanā)이라 할지라도 두려움과 같은 괴로운 느낌을 생기게 하는 괴로운 감각대상과 접촉했을 때 명백하듯이, 안식이 불선업에 대한 과보일 경우에는 안식은 괴로운 느낌을 수반할 것입니다.
시끄러운 소리는 귀를 먹게 할 수도 있고 고약한 냄새는 두통을 일으킬 수 있고 상한 음식은 건강을 해칠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네 가지 즐거운 감각대상을 조건으로 생긴 무덤덤한 느낌(upekkhā-vedanā)은 즐거운 느낌을 내포합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대상을 보고 즐거운 소리를 듣는 것을 즐깁니다. 이 무덤덤한 느낌이 선업에서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즐거운 특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청정도론」의 복주석서는 이렇게 설하고 있습니다.
“저급한 업의 무르익은 과보인 무덤덤한 느낌은 고통스러우며 그렇기 때문에 저급한 성품을 지니고 있다.” 다른 말로 하면 불선업을 기반으로 하는 무덤덤한 느낌은 무덤덤하고 중립적일 수 있지만, 그것은 악업에서 생겼기 때문에 마치 똥 무더기에서 피어나는 꽃처럼 저급하다.
게다가 괴로운 느낌(dukkha-vedanā)만큼 나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참을 수 없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저급하다. 사실, 악업의 과보는 결코 아픔이나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롭거나 선할 수 없다.
그 다음에 인과의 사슬에서 느낌의 기능을 설명하면서 복주서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불선업에서 기인한 무덤덤한 느낌은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에 고통(dukkha)이라고 해야 한다. 선업의 과보에서 기인한 무덤덤한 느낌은 바람직하기 때문에 즐거움(sukha)이라고 해야 한다.”
즐거운 소리를 들으면 우리에게 즐거운 느낌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달콤한 말은 귀가 환영하는 반면에 거친 말은 귀에 거슬립니다. 평범한 소리로 일어난 어떤 느낌들은 불분명하기 때문에 무덤덤한 느낌이라고 합니다.
들림으로 생기는 세 가지 느낌은 항상 알아차리고 있는 수행자에는 매우 익숙합니다. 수행자는 소리와 귀의 맞부딪침에서 괴로운 느낌(dukkha-vedanā)이나 즐거운 느낌(sukha-vedanā)이 생기고 그러한 느낌에 영향을 받는 자아(atta)나 영혼은 없으며 느낌은 순간적으로 일어났다 사라지며 모든 것은 무상하다는 것을 압니다. 수행자의 집중이 계발됨에 따라 세 가지 종류의 모든 느낌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짐을 알게 됩니다.
들림과 마찬가지로 냄새 맡음도 조건 지어져 있습니다. 비식(鼻識)은 코와 냄새의 맞부딪침에서 일어납니다. 냄새나 코의 감성 물질(ghāna-pāsada)없이 냄새를 맡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또 코의 감성 물질이 없는 사람은 드뭅니다. 나는 향수에 적신 손수건을 냄새 맡아도 특별히 아무런 향기를 못 느낀다고 하는 비구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설사 코의 감성 물질이 있더라도 코가 막혀 있거나 향기 나는 것이 없으면 냄새 맡지 못합니다. 향기는 공기에 의해서 풍겨 나와서 코의 감성 물질과 맞부딪쳤을 때만 감지됩니다.
보통 사람들은 냄새 맡는 자가 사람 혹은 존재라는 전도된 인식에 빠져 있습니다. 사실 비식을 생기게 하는 것은 공기에 의해 전해진 향기와 지속적인 흐름인 코의 감성 물질의 맞부딪침입니다.
봄, 들림과 마찬가지로 이 비식(鼻識)은 전향하는 마음(āvajjana-citta), 자와나(javana), 조사하는 마음(santīraṇa-citta)과 다른 단계를 포함하는 하나의 인식과정입니다. 물론 문제의 핵심은 물론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비식이 코와 냄새에 의존해서 끊임없이 생기고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썩은 물질의 역겨운 냄새나 꽃향기에 모두 익숙합니다. 보통사람은 냄새 맡는 것은 자신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수행자는 냄새 맡음은 단지 코와 향기와 비식의 결합에서 생기는 현상일 뿐이라고 알며 끊임없는 흐름과 모든 것의 무상함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수행자와 보통사람의 차이입니다.
느낌[受]은 감각접촉[觸]의 본성에 따라서 즐거울 수도 있고 즐겁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꽃향기나 향수의 냄새는 즐거운 느낌을 생기게 하고 물질의 썩는 냄새는 불쾌하게 합니다.
평범한 냄새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생기게 하는데, 이 느낌이 바로 무덤덤한 느낌(upekkhā-vedanā)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미세하기 때문에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수행자는 비식(鼻識)을 주시해서 세 가지 느낌과 그것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압니다.
맛을 아는 마음인 설식(舌識)은 혀와 음식이 맞부딪쳐서 생깁니다. 혀나 음식 맛이 없다면 설식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혀가 건강하지 못해서 감성을 상실했다면 음식 맛을 못 느낄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먹고 맛을 즐기는 것은 살아 있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상 혀의 감성 물질은 항상 변화하는 흐름에 있으며 이 물질과 음식의 맛과의 맞부딪침에서 앞에서 설명한 심찰나를 포함하는 설식이 일어납니다. 이 단계는 너무나 빨리 전개되기 때문에 단 하나의 심찰나로 여겨집니다. 이 설식은 혀와 맛에 따라서 매 순간마다 변합니다. 달고 시고 쓴 것 등을 아는 것이 바로 마음(citta)입니다.
혀와 맛과 식의 결합은 빨리어로 팟사(phassa)라고 하는 감각접촉[觸]을 뜻합니다. 이는 모든 사람에게는 친숙하지만 보통 사람은 맛을 느끼는 주인공은 살아 있는 존재인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먹는 동안 일어나는 모든 정신-물질 사건을 주시하는 수행자만이 그러한 정신-물질 사건이 혀와 맛과 식에 의존하는 하나의 현상이라고 압니다. 나중에 수행자는 그러한 정신-물질 사건의 끊임없는 흐름과 무상에 대한 분명한 통찰지를 얻습니다.
맛의 감각접촉[舌觸] 뒤에는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이 따라옵니다. 좋은 음식을 먹으면 즐겁고 그 음식을 좋아하지만 나쁜 음식이나 어떤 약의 쓴맛은 싫어합니다. 어떤 음식을 먹을 때의 느낌은 무덤덤함입니다.
이는 무덤덤한 느낌이지만 그 먹는 기회는 선업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음식을 먹는 것도 즐거운 측면을 가지고 있으며 집착에 이릅니다. 그러나 매순간 정신• 물질을 주시하여 계발된 삼매를 가진 수행자는 모든 (즐겁고, 괴롭고, 무덤덤한)감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체험으로 알게 됩니다.
감촉, 느낌 등의 또 하나의 근원은 몸의 문(kayā-dvāra)의 감성 물질입니다. “신식(身識)은 몸(몸의 감각기관)과 감촉대상에서 생깁니다. 몸의 감각접촉[觸]은 몸과 감촉대상과 신식의 결합에서 생기고 감각감촉은 (감촉의) 느낌을 조건 짓는다.”라고 합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좀더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봄, 들음, 냄새 맡음, 먹음과 같은 각각의 물질적 사건은 눈[眼], 귀[耳]와 같이 단지 해당하는 기관과 관계됩니다. 그들과 관련된 식(識)은 또한 머리의 어느 일정부위에서만 일어납니다.
이러한 정신• 물질적 사건들은 위치와 지속시간에서 제한이 있습니다. 먹을 때에는 오직 맛봄만을 알고 들리는 것이 있을 때에는 들림만 압니다. 하지만 신식은 몸의 모든 부위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언제 어느 때나 몸의 어느 한곳의 감촉을 생각할 때에는 언제나 그 감촉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촉의 영역은 광범위하고 그 지속시간은 깁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초보자는 감촉을 관찰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므로 여기에 대해서 좀 알아야 합니다.
감촉을 받아들일 수 있는 미세하고 민감한 감성 물질이 몸 전체에 두루 퍼져있습니다. 그것은 몸의 모든 건강한 부위에 존재하기 때문에 외부나 내부 물질과 맞부딪침으로써 몸의 어디에서든지 신식을 생기게 할 수 있습니다. 이 물질적 현상은 무상하고 순간에서 순간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전구로 들어가서 빛을 내는 전기 에너지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흐르고 있는 상태에서 아직 사라지지 않은 몸의 감성 물질이 외부나 내부의 물질과 충돌하면 그것에 의해서 신식이 생깁니다. 봄 등과 마찬가지로 이 신식(身識)도 감촉대상을 조사하는 마음, 받아들이는 마음, 등록하는 마음과 같은 심찰나의 연속을 포함합니다. 그러나 이 마음은 너무나 빨리 일어나고 사라지기 때문에 신식은 단 하나의 심찰나만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뿐입니다.
감촉을 아는 마음[身識]은 항상 있습니다. 마음이 몸 이외의 다른 대상에 몰두하고 있을 때에만 분명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나 몸에 주의를 기울이면 어딘가에는 몸과 바닥의 접촉, 몸과 옷의 접촉 등과 같은 감촉이 틀림없이 있습니다.
몸의 물리적 접촉에 대해서 알아차리는 수행자는 그 조건을 압니다. 즉, 몸의 물리적 접촉은 원인이 없는 것도, 창조된 것도 아니며 사실상 감촉대상과 건강한 상태의 감성 물질과의 결합에 의존한다는 것을 압니다. 감촉의 대상을 빨리어로 뽓따바(phoṭṭhabba)라고 하며 여기에는 땅의 요소[地大], 불의 요소[火大], 바람의 요소[風大]라는 세 가지 종류133가 있습니다.
...................
133. 감촉[觸]이라 번역한 뽓따바(phoṭṭhabba)는 몸의 기능[身根]의 대가 되는 몸의 감촉을 가리킨다. 그리고 아비담마에서 이 감촉은 땅의 요소[地大]와 불의 요소[火大]와 바람의 요소[風大] 그 자체라고 설명한다. 땅의 요소[地大]는 딱딱함이라 설명되는데 이것은 딱딱하고 부드러운 촉감으로 인식되며 불의 요소[火大]는 덥거나 차가움으로 느껴진다. 바람의 요소[風大]는 팽창이나 압박으로 느껴진다. 한편 물의 요소[水大]는 응집력을 특징으로 하는데 이것은 감촉으로써는 느끼지 못하고 마노의 문[意門]으로만 느낄 수 있다. 영어로는 보통 touch, bodily impression, tactile impression이라고 한다.
그리고 감각접촉[觸]으로 번역되는 팟사(phassa)는 ‘닿음’을 뜻한다. 12연기 중 하나의 각지로 알려진 술어이다. 여기서 닿음이란 대상이 몸에 물질적으로 부딪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이것을 통해서 나타난 대상을 정신적으로 ‘만지는’것을 뜻하며 그로 인해 모든 인식과정을 시작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감각접촉(觸)은 경에서도 기능(根 indriya), 대상(境 visaya), 식(識 viññaṇa)의 세 가지가 맞부딪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즉 마음을 대상과 맞부딪치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서양에서도 이 phassa의 의미를 좀더 살려 정확성을 기하고자 할 때에는 sense contact외에도 sense impression이나 mental impression이라 번역하기도 한다.
정리를 하면 phoṭṭhabba(감촉)는 물질에 속하고 phassa(감각접촉)은 심소법(心所法)에 속한다. 즉 색• 성• 향• 미• 촉의 감촉(photthabba)은 물질이고 12연기의 촉• 수• 애• 취• 유의 촉(phassa)은 심리현상이다. 감촉(phoṭṭhabba)과 감각접촉(phassa)은 중국에서 둘 다 촉(觸)으로 옮겼지만 완전히 다른 술어이다.
...................
땅의 요소[地大]는 견고함, 혹은 거침의 특성이 있으며 이 특성은 분명한 감촉을 느끼게 하는 몸의 일부에 주의를 집중하거나 조사하면 드러납니다. 부드러움 또한 땅의 요소[地大]로 간주되는데 부드러움과 거침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둘투둘한 표면은 그보다 거친 많은 것들과 비교했을 때엔 부드러운 대상이라고 하지만 사람 눈의 부드러운 부위에 맞닿았을 때는 거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부드러움과 거침은 종류가 다른 것이 아니라, 정도에서 다를 뿐인 상대적인 용어입니다. 부드러움과 거침은 땅의 요소의 특성인 견고함을 나타냅니다.
주석서에 따르면 땅의 요소[地大]의 핵심인 견고함은 다른 요소들이 의지해야 하는 거처인데 이는 마치 모든 대상이 땅에 의지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를 들면, 쌀가루를 물로 반죽하면 덩어리로 변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견고함, 즉 단단한 성질이 훨씬 더 많기 때문에 그것은 땅의 요소[地大]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분말의 입자는 물의 요소[水大]에 의해 서로 결합되고 뭉쳐집니다. 그 덩어리는 또한 열이나 차가움과 관련된 불의 요소[火大]와 딱딱함과 뻣뻣함을 지원하는 바람의 요소[風大]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쌀가루로 만든 덩어리는 네 가지 요소[四大]를 모두 함유하고 있고 그중에서도 땅의 요소[地大]는 다른 요소들의 기반입니다. 그래서 마치 쌀가루가 물의 요소[水大]등을 지탱해주듯이 땅의 요소[地大]는 그것과 관련된 물질을 지탱해줍니다. 이것이 땅의 요소의 역할(rasa)입니다.
그런 식으로 수행자에게는 땅의 요소[地大]가 다른 요소들의 기반으로 보입니다. 이것이 땅의 요소[地大]의 나타남(paccupaṭṭhāna)으로 무거움과 가벼움입니다. 아비담마 칠론의 하나인「법집론」과 그 주석서인「아따살리니」는 땅의 요소는 무거움과 가벼움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물건을 옮길 때 무거움과 가벼움을 느낀다면, 그 느낌 혹은 생각은 땅의 요소[地大]의 나타남(paccupaṭṭhāna)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거침이나 부드러움이나 반드러움을 통해서 땅의 요소[地大]의 특징을 압니다.
수행자는 땅의 요소[地大]가 다른 물질의 기반이 된다는 것을 알 때 그 기능도 알게 됩니다. 또 수행자는 다른 물질은 땅의 요소[地大]에 있고 그것은 다른 물질을 생기게 하고 무거움이나 가벼움이라고 알 때 땅의 요소[地大]의 나타남을 압니다.
수행자가 다른 물질은 땅의 요소[地大]에 의존해 있고, 땅의 요소[地大]는 다른 물질을 지탱해 주고, 또 땅의 요소[地大]는 무거움과 가벼움이라고 알 때, 그것의 나타남을 압니다. 그렇게 땅의 요소[地大]를 특성(lakkhaṇa)과 역할(rasa)과 나타남(paccupaṭṭhāna)으로 아는 것은 진리의 깨달음과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nāmarūpa-pariccheda-ñāṇa)를 뜻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땅의 요소[地大]와 접촉할 때 일반적으로 손과 발과 옷과 사람 등으로 이해합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잘못된 것으로 수행자는 사념처 수행으로 진실을 깨닫습니다.
불의 요소[火大]는 열을 뜻합니다. 몸의 어떤 부분이 뜨겁고 눌려 있기 때문에 자세를 바꿀 때 불의 요소[火大]가 두드러집니다. 차가움도 약한 불의 요소[火大]의 일종입니다. 어떤 물체는 다른 것에 비해 뜨겁거나 차갑습니다.
나무 그늘은 태양의 열기에 비해서는 서늘하겠지만 동굴이나 집의 내부에 비해서는 뜨겁습니다. 항아리속의 물은 노천에 있는 물에 비해서는 시원하겠지만 얼음물에 비하면 뜨겁습니다. 뜨겁고 따뜻하고 차가운 것은 본질적으로 불의 요소[火大]를 뜻하는 상대적인 용어입니다.
불의 요소[火大]인 열은 성숙과 성장에 꼭 필요합니다. 열의 역할은 유기체를 성숙하고 숙성하게 합니다. 나무, 건물, 대지, 바위 등이 낡아가고 쇠퇴해가는 것은 태양 때문이고 흰 머리카락, 이가 빠짐, 주름살, 다른 노화의 징후가 생기는 것은 몸의 열 때문입니다.
열이 많으면 성숙의 과정은 더욱 더 빨라집니다. 불의 요소[火大]는 물질을 부드럽고 유연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수행자가 “뜨거움, 뜨거움”을 주시하면 부드럽고 느슨하게 불의 요소[火大]의 역할을 깨닫습니다.
열이나 차가움이 몸 안에서 드러나면 사념처 수행자는 불의 요소[火大]를 그 특성으로 아는 것입니다. 불의 요소가 사물을 부드럽고 유연하게 한다는 것을 알면 그 역할(rasa)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수행자는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nāmarūpa-pariccheda-ñāṇa)를 얻어서 불의 요소[火大]를 손, 남자, 여자 등과 같은 본질과 실체로 생각하는 전도된 인식에서 벗어납니다.
바람의 요소[風大]는 뻣뻣함과 경직됨의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똑바로 앉아서 등을 펴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뻣뻣함을 발견할 것입니다. 다시 팔을 펴고 마음을 팔에다 고정시켜 보십시오. 뻣뻣함을 알 것입니다. 그러므로 “앉아있음”을 정신적으로 주시하면 특성으로서 바람의 요소[風大]를 알게 됩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자아나 아뜨만(atman) 등이 아니라 그냥 뻣뻣함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바람의 요소[風大]의 진정한 본성에 대한 이러한 통찰지가 참 중요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수행자의 통찰지가 반드시 뻣뻣함이라는 실체에 국한될 필요는 없습니다. 실체나 자아 등에 대한 관념이 마음에 끊임없이 떠오릅니다. 왜냐하면 보통 사람은 초기에 집중력이 약해서 마음을 자유로이 방황하게 내버려 두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고요함이나 통찰지와 상충하고 정신적 진보를 방해하는 감각적 욕망이나 다른 장애[五蓋]들에 의해 휘둘립니다. 그 결과 마음은 근본 요소[四大]들의 실체에 고정되지 않습니다. 어떤 스승들은 모든 관습적 개념은 처음부터 떨어져 나간다고 믿게끔 하였지만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초보자가 장애[五蓋]로부터 자유롭고, 마음과 견해가 청정해지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부처님에게 직접 법을 듣고 성스러운 도를 성취한 사람들은 예외겠지만 그렇지 않은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러한 성취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한다고 처음부터 통찰지가 생기지는 않습니다. 정신-물질을 관찰하는 동안 수행자가 집중력이 강해져서 망상할 여지가 거의 없어지면 지속적으로 알아차리게 됩니다.
이렇게 마음이 청정해진 단계가 되어야만 정신과 물질의 진정한 본성에 대한 통찰지가 생깁니다. 그렇게 된 다음에도 무너짐의 지혜(bhaṅga-ñāṇa)를 얻기 전까지는 관습적인 개념들이 좀처럼 떨어져 나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일어남과 사라짐에 대한 지혜(udayabhaya-ñāṇa)의 초기단계에서 수행자는 “파고다 난간 위의 광명, 꽃이나 바다 속의 물고기와 거북이”를 보려하는 경향이 있다고 「청정도론」(Vis.XX.107~109)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관찰의 대상인 정신-물질, 그리고 관찰하는 마음이 차례대로 사라짐을 발견합니다. 「청정도론」에서 “주의력은 소멸, 사라짐, 무너짐에 모아져 있다.”라고 설하듯이 모양, 형태 등과 같은 관습적인 개념들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초기에 자신이 관찰하고 있는 대상만 바르게 알고 있으면 됩니다. 발을 들어 올리는 순간 뻣뻣함, 즉 바람(vāyo)이 분명해집니다. 우리에게 이를 알게 하려고 부처님께서는 “수행자는 자신이 걷고 있을 때, ‘걷고 있다’고 안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수행자는 자신이 걷고 있다는 사실을 그냥 알고 있도록 지시를 받는 것이지 뻣뻣함, 즉 바람의 요소[風大]를 숙고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때 명칭은 적절하지 않고, 가장 중요한 것은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며, 또 수행자는 통속적인 습관으로 현상을 주시할 수 있음을 뜻합니다.
또 바람의 요소[風大]는 몸의 어느 부위의 움직임에서도 드러납니다. 그러한 움직임과 배가 일어나고 꺼짐에서 뻣뻣함을 아는 것은 바람의 요소[風大]의 진정한 특성을 아는 것을 뜻합니다. 느슨함도 바람의 요소[風大]의 한 특성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것의 팽팽함과 느슨함을 언급할 때 상대적으로 그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움직이고, 숙이고, 기울이고, 옮기는 것도 바람의 요소[風大]의 역할입니다. 손을 구부릴 때 손의 움직임을 주시하는 수행자는 바람의 요소[風大]의 참된 본성을 알게 됩니다. 걸음 등에 주의를 집중할 때에도 그것을 압니다. 그러한 움직임에서 대상을 남자나 여자나 몸 등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수행자는 바람의 요소[風大]의 참된 본성을 뜻하는 점진적 움직임이라고만 알 뿐입니다. 수행자는 또한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움직일 때에도 무언가가 밀고 있다든지 다른 것을 끌고 있는 것을 압니다. 그런 식으로 수행자는 정신의 시계 내에 나타나는 현상을 통해서 바람의 요소[風大]를 압니다. 이것이 바로 경전에서 “인도함으로 나타남(abhinīhāra-paccupaṭṭhāna)”이라고 설하는 나타남(paccupaṭṭhāna)에 의한 앎입니다.
땅의 요소[地大]와 불의 요소[火大]와 바람의 요소[風大]라는 세 가지 근본 요소는 모두 감촉(phoṭṭhabba)을 통해서만 알려집니다.134 들음 등을 통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물의 소리를 들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거친지 부드러운지, 뜨거운지 차가운지, 뻣뻣한지, 견고한지, 움직이는지 말할 수 없습니다. 사물의 냄새[香]나 맛[味]이나 형상[色]도 그 사물의 근본 성품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봄을 통해서 근본요소[四大]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대중화된 믿음입니다.
...................
134. 감촉(phoṭṭhabba)은 몸의 기능[身根]의 대가 되는 것이며 아비담마에서는 땅의 요소[地大]와 불의 요소[火大]와 바람의 요소[風大]라고 설명한다. 땅의 요소[地大]는 딱딱함이라 설명되는데 이것은 딱딱하고 부드러운 촉감으로 인식되며 불의 요소[火大]는 덥거나 차가움으로 느껴진다. 바람의 요소[風大]는 팽창이나 압박으로 느껴진다. 한편 물의 요소[水大]는 응집력을 특징으로 하는데 이것은 감촉으로써는 느끼지 못하고 마노의 문[意門]으로만 느낄 수 있다.
...................
바위나 쇳덩어리가 확실히 우리에게 단단하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인상은 봄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과거의 감촉을 토대로 한 귀납적인 일반화 일뿐입니다.
봄에 의해서 우리가 아는 것은 시각적인 형상[色]일 뿐으로, 단단한 땅이라고 믿고 디뎠다가 수렁에 빠진다든지, 뜨거운 쇠막대기를 모르고 잡았을 때 화상을 입는 경우처럼, 시각적인 형상은 때때로 그릇된 인상을 줍니다.
바람의 요소[風大]도 봄으로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체험해야만 알 수 있는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물체가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는데 왜냐하면 그것을 여기저기서 보기 때문이며 그 움직임을 안다고 하는 것은 그 움직임을 관찰해서 얻은 추론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멈추고 있던 두 대의 기차 중 한 대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움직이지 않고 있는 다른 기차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고, 달리고 있는 기차에 타고 있는 승객에게는 창밖의 나무들이 반대 방향으로 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시각적인 착각은 움직임의 진리에 대해서 우리가 눈에 의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한때 명상에 관심이 많은 나이 지긋한 남자 신도가 스승인 비구와의 대화를 우리에게 전해주었습니다. 베개를 집어 흔들면서 비구에게 “자, 스님, 지금 어떤 법이 사라지고 있음을 보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음, 바람의 요소[風大]가 사라지고 있음을 봅니다.”
“스님, 틀렸습니다. 스님께서 눈으로 보고 계신 것은 형상일 뿐입니다. 보는 순간을 알아차리신다면 스님은 형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만 아실뿐입니다. 보는 순간에는 바람의 요소[風大]에 대해서 아무것도 체험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위빠사나는 내관에 의해서 실제로 아는 것을 우선으로 하는 수행입니다. 추론에 의해서 다른 사실을 주시하고 깨닫는 것은 그 다음입니다. 감각대상에 해당하는 감각기관을 통해서만 각 감각대상을 관찰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바람의 요소[風大]는 몸의 접촉에 의해서만 알 수 있는 대상입니다.
만약 우리가 걷거나 구부리거나 하는 동안 내관한다면 바람의 요소[風大]의 움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스님께서는 바람의 요소[風大]와 접촉하지 않으면서 그 소멸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스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부자연스럽고 틀렸습니다.”
이 남자 신도의 비평에는 많은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어떤 스승들은 「염처경」과 다른 경전들을 참고용으로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자연 현상만 다루는 논서를 근거로 순전히 이론적인 가르침만을 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수행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수행이 수행자들을 영적으로 이롭게 할지는 모르지만 진정한 통찰지나 성스러운 도의 단계를 증득하기 위해서는 의지할 것이 못됩니다. 추론적인 내관을 통해서도 통찰지를 얻는 근기를 타고난 일부 수행자들만이 유일한 예외입니다.
「염처경」에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여섯 감각기관[六根]에서 일어나는 정신-물질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유일한 길(eka yāno maggo)135”입니다.
...................
135.「대념처경」(D22)에 나오는 전문은 다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이 도는 유일한 길이니, 중생들의 청정을 위하고, 근심과 탄식을 다 건너기 위한 것이며,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사라지게 하고, 옳은 방법을 터득하고,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사념처(四念處)이다.”
...................
신식(身識)에 대응하는 감촉의 경우 우리는 내• 외부적으로 몸의 맞부딪침을 알 때 감촉을 주시하고 인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감촉은 무명이나 다른 번뇌와 결합해서 우리를 지배하기 십상입니다.
그렇게 되면 항상하고, 행복하고, 자아가 있다는 전도된 인식136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감촉을 통해 몸의 어떤 부위들에 집착하게 되면 우리는 그것들을 영원하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선호도에 따라 차별을 두게 됩니다. 모든 감촉을 주시하여 그 감각의 무상하고 불만족스럽고 실체 없는 본성을 깨닫는다면, 거기에는 집착이 없을 것이며 우리는 깨달음과 열반에 확실히 이르는 위빠사나의 바른 도위에 서게 됩니다.
...................
136. 인식(想 saññā)은 빨리 경전과「청정도론」등의 주석서에서 상락아정(常樂我淨)에 대한 인식, 즉 항상하다, 즐겁다, 자아다, 깨끗하다는 네 가지 전도된 인식(vipallāsa-saññā)들로 정형화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무상• 고• 무아• 부정이라는 유위법의 네 가지 특징을 전도되어 잘못 인식한 것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도 “① 무상(anicca)을 관찰하여 영원하다는 인식(nicca-saññā)을 버린다. ② 괴로움(dukkha)을 관찰하여 행복하다는 인식(sukha-saññā)을 버린다. ③ 무아(anatta)를 관찰하여 자아라는 인식(atta-saññā)을 버린다. ④ 더러움(asubha)을 관찰하여 깨끗하다는 인식(subha-saññā)을 버린다.”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
몸의 감성(kāya-pāsada)은 몸이 건강한 상태일 때는 전신에 고루 퍼져있는 것이 특성입니다. 옷, 공기등과 같이 감촉을 줄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몸도 머리카락, 피부등과 같이 감촉에 알맞은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몸의 감성과 접촉하는 외부적이고 내부적인 대상들이 항상 존재합니다.
숙고해보면 몸의 모든 부위에는 감촉의 가능성이 있으며 몸에는 아무리 작은 부위라도 접촉을 허용하지 않는 부위가 없음을 분명하게 알게 될 것이며 이러한 감촉이 신식(身識)을 생기게 합니다.
몸의 감성과 감촉 대상과 신식(身識)의 결합에서 아주 분명한 감각접촉(phassa)이 생깁니다. 즐거운 감각접촉은 즐거운 느낌을 생기게 하고, 괴로운 감각접촉은 괴로운 느낌을 생기게 합니다. 감각접촉[觸]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느낌도 더욱 더 강렬해집니다.


상위
   
인용하여 댓글 달기  
이전 게시글 표시:  정렬  
새 주제 게시글 주제글에 댓글 달기  [ 1 개의 게시글 ] 

모든 시간은 UTC + 9 시간 으로 표시합니다


접속 중인 사용자

이 포럼에 접속 중인 사용자: 접속한 회원이 없음 그리고 손님 1 명


이 포럼에서 새 주제글을 게시할 수 없습니다
이 포럼에서 그 주제글에 댓글을 달 수 없습니다
이 포럼에서 당신이 게시한 글을 수정할 수 없습니다
이 포럼에서 당신이 게시한 글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 포럼에 첨부파일을 게시할 수 없습니다

찾기:
이동:  
cron
POWERED_BY
Free Translated by michael in phpBB K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