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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글 제목: (Mahāsi Sayādaw)39~47
전체글올린 게시글: 2015-12-30, (수) 12:27 am 

가입일: 2015-01-30, (금) 10:13 pm
전체글: 103
PA¿ICCASAMUPPÆDA 39
39. TA¤HÆ AND SAMSÆRA
Simultaneously with the arising of consciousness at the moment of seeing, etc., there arise næmarþpa, æyatana, phassa and vedanæ. For every ordinary person who is not yet free from defilements, vedanæ (feeling) leads to ta¼hæ. Ta¼hæ in turn causes upædæna (clinging) that makes him do a good or a bad deed (kammabhava). Under certain conditions, kammabhava gives rise to rebirth that makes living beings subject to old age, sickness, death, grief and all other mental and physical sufferings. This is how feelings lead to samsæric dukkha.
Nobody can prevent the arising of næmarþpa, æyatana, phassa and vedanæ as concomitants of viññæ¼a. The Buddha and the Arahats, too, have pleasant, unpleasant or neutral (upekkhæ) feelings as a result of contact with sense-objects. They feel pain that arise from physical affliction. But they do not suffer mentally; nor do they take delight in pleasant sensations. So they are free from craving and attachment. They do not strive far pleasure and happiness and because of their non-kammic way of life, they do away with rebirth, næmarþpa and other causes of suffering. This is the extinction of dukkha for the Arahat who is completely free from defilements.
So it is said, “Due to the complete extinction of ta¼hæ, that is rooted in pleasant or unpleasant feeling on the Ariyan path, there arises the extinction of upædæna” (clinging). Experience of the pleasant or unpleasant feelings make the non-Arahats crave for the good things of life. But it has no effect on the person who has attained Arahatship after passing through the successive stages on the holy path. This may sound incredible to the common people but in fact the most alluring sense-object has no appeal for the Arahat and he takes no interest in his welfare. He is therefore wholly free from craving and attachment and this means complete extinction of kammic effort, rebirth and its attendant suffering.
So it is said, “The extinction of upædæna leads to the extinction of the cause of rebirth (kammic effort). The extinction of kammic effort leads to extinction of rebirth. Extinction of rebirth leads to extinction of old age, death, grief, etc.

39. 갈애와 윤회
봄 등의 순간에 식이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정신-물질[名色]과 여섯 감각장소[六入]와 감각접촉[觸]과 느낌[受]이 일어납니다. 번뇌로부터 아직 자유롭지 않은 모든 범부에게 느낌[受]은 갈애[愛]를 일으킵니다. 그러면 갈애는 선하거나 불선한 업을 짓도록 하는 집착[取]을 일으킵니다.
이것이 바로 업으로서의 존재(業有 kamma-bhava)입니다. 특정한 조건하에서 업으로서의 존재[業有]는 중생으로 하여금 늙음, 병듦, 죽음, 근심과 다른 모든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받도록 하는 재생을 일으킵니다. 이것이 바로 느낌[受]이 어떻게 윤회고에 이르는지를 보여줍니다.
식(識)의 부수물로 정신-물질[名色]과 여섯 감각장소[六入]와 감각접촉[觸]과 느낌[受]이 일어나는 것을 아무도 막지 못합니다. 부처님과 아라한도 감각접촉[觸]으로 인해 즐겁거나 괴롭거나 무덤덤한 느낌이 생깁니다. 그분들도 육체적인 고통에서 생기는 통증을 느낍니다.
하지만 부처님과 아라한은 정신적으로 괴로워하지 않으며 즐거운 감각을 기뻐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은 갈애와 집착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그분들은 즐거움이나 행복을 얻으려고 애쓰지 않으며 업을 짓지 않고 살기 때문에 재생과 정신-물질[名色]과 기타 괴로움의 원인을 없앱니다. 이것이 바로 번뇌에서 완전히 벗어난 아라한의 괴로움의 소멸입니다.
그래서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에 뿌리를 두고 있는 갈애[愛]의 완전한 소멸로 성스러운 도에서 집착[取]이 소멸하게 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라한이 아닌 사람들이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을 경험하면 삶의 좋은 것들에 대한 갈애가 생깁니다. 하지만 성스러운 도의 연이은 단계들을 모두 거친 다음 아라한과를 얻은 사람에게는 아무런 영향이 없습니다.
보통 사람에게는 이러한 말이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 자신의 행복에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는 아라한에게는 아무리 매혹적인 감각대상에도 끌림이 없습니다. 아라한은 갈애와 집착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우며, 이는 업형성력인 상카라와 재생과 그에 수반되는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을 뜻합니다.
그래서 “집착이 소멸되면 태어남의 원인인 업형성력이 소멸한다. 업형성력이 소멸하면 태어남이 소멸한다.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음, 죽음, 근심 등이 소멸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PA¿ICCASAMUPPÆDA 40
40. EXTINCTION OF CRAVING
In short, with the complete extinction of ta¼hæ due to Arahatship, there is the complete extinction of all its consequences and this means the extinction of suffering. It does not imply the disappearance of happiness or a living being. It is simply the cessation of the næmarþpa process that is the source of dukkha.
Just as Arahatship means complete extinction of craving, the attainment of anægæmi stage on the path means extinction of sensuous craving together with rebirth in the sensual world, old age, death, etc. At the sotæpanna stage the yogø is assured of extinction of all craving that may lead to the lower worlds or more than seven existences. So he is free from all suffering of the lower worlds and the suffering for more than seven lifetimes in the sensual worlds. Thus implicit in the Paticcasamuppæda is the lessening of dukkha with the weakening of ta¼hæ.
Likewise, the vipassanæ insight ensures the momentary extinction of ta¼hæ. The arising of six sense-objects leads to pleasant or unpleasant feeling and in the absence of vipassanæ insight it finally ends in ta¼hæ and its attendant suffering.
But as for the yogø who practises constant mindfulness and has developed vipassanæ insight, he finds only the arising and passing away of all phenomena, their impermanence, suffering and impersonality. He also finds that the pleasant or unpleasant feeling arises and passes away instantly. So he does not delight in the feeling that arises, he does not crave for another feeling; he is free from
all craving.

Extinction of craving on the Ariyan holy path differs from extinction by vipassanæ in that in the former case the extinction is permanent and it concerns every sense-object whereas in the latter case extinction is neither permanent nor universal. Ta¼hæ is extinct only at the moment of contemplation and only in respect of the object contemplated. Hence it is called “tada³ga nibbþti” momentary or partial extinction of defilements.
The yogø who practises meditation is barely aware of seeing, hearing, etc. This state of bare awareness leaves no room for ta¼hæ and as the result upædæna (clinging) kamma, rebirth, etc. cease to occur. In other words, with the cessation of ta¼hæ, the samsæric cycle is partly cut off and this is called tada³ga nibbþti.

40. 갈애의 소멸
요컨대, 아라한과를 증득하여 갈애가 완전히 소멸하면 그 모든 결과들이 완전히 소멸하는 것이고, 이는 괴로움의 소멸을 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행복이나 중생이 사라졌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괴로움의 근원인 정신-물질 과정이 소멸한 것일 뿐입니다.
아라한과의 성취가 갈애의 완전한 소멸을 뜻하는 것처럼 불환과의 성취는 욕계의 재생, 늙음과 죽음, 감각적 갈애가 소멸함을 뜻합니다. 예류과를 성취한 수행자는 악처에 이르게 하거나 일곱 번 이상 다시 태어나는 모든 갈애의 소멸이 보장됩니다.
그래서 예류자는 악처의 모든 괴로움과 욕계에서 일곱 번 이상 태어나는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이처럼 연기법의 함축된 의미는 갈애가 약화되면 괴로움도 적어진다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위빠사나 지혜는 갈애의 순간적인 소멸을 보장합니다. 여섯 감각대상[六境]들은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들이 일어나게 하는데, 위빠사나 지혜가 없는 경우에는 결국 갈애와 그에 수반되는 괴로움으로 귀결됩니다.
하지만 끊임없는 알아차림을 닦아서 위빠사나 지혜를 계발한 수행자는 모든 현상들의 일어나고 사라짐과 그것들의 무상• 고• 무아만을 발견합니다. 수행자는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이 즉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도 발견합니다.
그리하여 수행자는 일어나는 느낌을 기뻐하지도 않고, 또 다른 느낌을 갈망하지도 않기에 모든 갈애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수행자는 또한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은 일어났다가는 곧장 사라짐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일어나는 느낌을 즐거워하지 않고 또 다른 느낌을 갈망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그는 모든 갈애에서 벗어납니다.
성스러운 도의 갈애의 소멸은 영원한 것이며 모든 감각대상과 관련된 것임에 반하여 위빠사나에 의한 소멸은 소멸이 영원하지도 않고 보편적이지도 않다는 면에서 위빠사나에 의한 소멸과는 다릅니다.
관찰하는 순간만, 그리고 관찰되는 대상에 대해서만 갈애가 소멸됩니다. 그런 이유로 위빠사나에 의한 소멸을 번뇌의 부분적인 혹은 일시적인 적멸(tadaṅga-nibbuti)이라고 합니다.
명상하는 수행자는 봄, 들음 등을 있는 그대로 압니다. 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아는 상태에서는 갈애가 생길 여지가 없으며, 그 결과 집착, 업, 재생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갈애가 소멸됨으로써, 윤회의 바퀴가 부분적으로 단절되며 이를 일시적인 적멸(tadaṅga-nibbuti)이라고 합니다.


PA¿ICCASAMUPPÆDA 41
41. THE STORY OF MAHÆTISSA THERA
There is the story of Mahætissa thera in Sri Lanka who overcame ta¼hæ through the practice of both samatha and vipassanæ. One day he left his forest retreat early in the morning and on the way to Anurädha city for his begging round he met a woman who had left her home after quarrelling with her husband. At the sight of the thera, there arose in her a lustful desire and she laughed aloud seductively. On looking at her the thera noticed her teeth. Since he had been contemplating the skeleton, the whole body of the woman appeared as a heap of bones. He concentrated on this mental image and attained jhæna. Then after contemplating the image of the skeleton in his jhænic state of mind, he attained Arahatship.
The thera continued his journey and on the way met the woman’s husband. The man asked him whether he had seen a woman. The thera replied that he did see something but that he did not know whether it was a man or a woman. All that he noticed was a skeleton that passed him on the way.
What he actually saw was the woman’s teeth but his practice of contemplation had turned his impression of her body into the image of a skeleton. Hence in his mind thera was no room for lust or any other defilement arising from his sense-contact with the woman. Then practising vipassanæ on the basis of his jhænic consciousness, he became free from defilements and attained Arahatship.
This story might raise doubts among non-meditating people as regards the arising of the image of a skeleton at the sight of a person’s teeth. But without practice one cannot have any clear idea of what mind-training (bhævanæ) can accomplish. The mere exercise of concentration without any training cannot help to create mental images. For these depend on stead-fast and prolonged practice of contemplation. Imagination is the power of perception. Repeated contemplation strengthens perception which then helps create any kind of image of oneself or other people. This faculty of mind is possible even for a parrot as is borne out by a story in the commentary on Satipatthæna sutta.

41. 마하띳사 장로 이야기
「청정도론」(Vis.Ⅰ.55)에는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함께 닦아서 갈애를 극복한 스리랑카의 마하띳사(Mahā-tissa) 장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루는 장로가 탁발하기 위해서 아침 일찍 숲속 집중 수행처를 떠나 아누라다푸라(Anurādhapura)로 가는 도중에 남편과 말다툼을 하고서 집을 뛰쳐나온 한 여자를 만났습니다.
여자는 장로를 보자 욕정이 생겨서 요염하게 큰 소리로 웃었습니다. 그러나 마하띳사는 그 여자를 바라보는 순간 이빨을 주시하였습니다. 장로는 뼈(aṭṭhi)를 관찰해왔기 때문에, 여자의 전신은 뼈 무더기로 보였습니다. 장로는 이 정신적 표상에 집중해서 선정을 얻었습니다141. 그리고는 이 선정상태에서 해골의 표상을 관찰한 다음에 아라한과를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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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이러한 사마타 수행을 부정관(不淨觀), 또는 부정상(不淨想 asubha-sañña)이라고 한다. 부정관은 모두 시체의 썩은 정도나 흩어진 정도를 가지고 다음의 열 가지로 나누고 있다.
① 부푼 것 ② 검푸른 것 ③ 문드러진 것 ④ 끊어진 것 ⑤ 뜯어 먹힌 것 ⑥ 흩어진 것 ⑦ 난도질 당하여 뿔뿔이 흩어진 것 ⑧ 피가 흐르는 것 ⑨ 벌레가 버글거리는 것 ⑩ 해골이 된 것
이 부정관은 특히 탐욕이 많은 사람에게 적합한 수행법이라고 잘 알려져 왔다. 그만큼 명상주제 가운데 가장 무섭고 어려운 주제라고 한다. 이러한 수행법은 주석서에서도 종종 언급되고 있을 정도로 부처님 당시부터 불자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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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는 계속 길을 가다가 도중에 여자의 남편을 만났습니다. 사내는 장로에게 어떤 여자를 못 봤냐고 물었습니다. 장로는 뭔가를 보기는 했는데 그게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장로가 본 것은 도중에 지나쳐간 뼈 무더기가 전부였습니다.
장로가 실제로 본 것은 여자의 이빨이었지만 관찰수행으로 여자 몸과의 감각접촉[觸]을 뼈의 표상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장로의 마음에 여자와의 감각접촉[觸]에서 욕정이나 다른 번뇌가 생길 틈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선정의 마음을 토대로 위빠사나를 닦아 번뇌에서 벗어나고 아라한과를 얻었습니다.
수행하지 않는 사람들은 사람의 이빨을 보고 해골의 표상을 떠올렸다는 이 이야기에 대해 의구심이 들지 모릅니다. 하지만 명상을 해보지 않고서는 수행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는지 분명히 인식할 수 없습니다. 아무런 수련 없이 그냥 집중만으로는 정신적 표상을 만드는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이러한 정신적 표상은 꾸준하고 장기간의 관찰수행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상상은 인식[想]의 힘입니다. 계속해서 관찰하면 인식[想]이 강해지는데 그렇게 강해진 인식[想]은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어떠한 표상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장부』「염처경」(D21)주석서에 나오는 다음의 이야기가 입증하듯이 마음의 이러한 기능은 앵무새도 가능합니다.


PA¿ICCASAMUPPÆDA 42
42. STORY OF A PARROT
A dancer put up for the night at the residence of bhikkhunis and when she went away she left an intelligent parrot. The bird was cared for by the novitiates and it was called Buddha-rakkhita. The abbess of the nunnery thought that it would be good if there was something to contemplate for the bird living among the spiritual aspirants. So she taught her to contemplate “atthi: skeleton”.
One morning the parrot was swooped up by an eagle. In the wake of the hue and cry raised by the young nuns, the eagle became frightened and dropped the parrot. The nuns brought the bird to the Abbess. The Abbess asked it what it contemplated when it was seized by the eagle. The bird replied, “I thought of a skeleton being carried off and I wondered where it would be scattered” The Abbess said, “Well done! This contemplation will contribute to your liberation from samsäric existence.” A thing that is repeatedly contemplated will become fixed in the long run. Since even a parrot can imagine a skeleton, there is no reason why a human being cannot do likewise. The parrot imagined itself as well as others to be skeletons. Because of this contemplation, it had no fear, anger or worry when it was taken away by the eagle.
So Satipa¥¥hæna bhævanæ is extolled as a practice that helps to overcome grief and anxiety and to bring about the extinction of mental and physical suffering. But there may be many people who are not as wise as the parrot in the story since they never take interest in the dhamma and contemplate it. The yogø should resolve to surpass the parrot in the practice of vipassanæ.
If Mahætissa thera had failed to regard the laughing woman as a skeleton, he might have become lustful and fallen a victim of temptation in the solitude of the forest. Even if he had no sexual desire; at that time, any impression of the woman would have laid him open to temptation at other times. But thanks to his contemplation of the skeleton in the practice of vipassanæ, he overcame defilements and achieved final liberation from samsæric existence. Here the extinction of ta¼hæ through vipassanæ practice is called tadanga nibbuti, partial extinction while extinction through arahatship is called “total extinction.”

42. 앵무새 이야기
어떤 무용수가 비구니 처소에 하룻밤 머물고 난후 영리한 앵무새 한 마리를 남겨 두고 갔습니다. 앵무새는 사미니들이 돌봐 주었는데 붓다락키따(Buddha-rakkhita)라고 불렸습니다. 비구니 승원의 주지 비구니는 영적인 진보를 추구하는 이들 가운데 사는 이 앵무새에게 관찰할 뭔가가 있으면 좋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주지 비구니는 앵무새에게 뼈(aṭṭhi)를 관찰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앵무새는 독수리에게 채였습니다. 어린 비구니들의 고함과 울부짖음에 독수리는 화들짝 놀라 앵무새를 떨어트렸습니다. 비구니들은 주지 비구니에게 앵무새를 데려갔습니다. 주지 비구니는 독수리에게 잡혔을 때 무엇을 관찰하였는지 물었습니다.
앵무새는 "낚인 해골을 생각하였고 이 해골이 어디에서 흩어질지 생각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주지 비구니는 "잘 했다! 이 관찰은 네가 윤회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것을 끊임없이 관찰하면 언젠가는 마음이 하나로 고정될 것입니다. 앵무새조차도 뼈를 관찰할 수 있는데 사람이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앵무새는 자신과 다른 이들을 뼈로 상상했습니다. 이러한 관찰 때문에 앵무새는 독수리에게 잡혀 갈 때 두려움, 성냄, 걱정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념처 명상은 근심과 불안을 극복하고 정신• 육체적 고통을 없애는데 도움이 되는 수행으로 극찬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법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또 법을 관찰하지 않기 때문에 이 이야기의 앵무새만큼이나 지혜롭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 입니다. 수행자는 이 앵무새를 능가하겠다고 굳게 다짐해야 합니다.
만약 마하띳사 장로가 웃는 여인을 뼈로 인식하지 못했다면 인적 없는 숲속에서 욕정을 일으켜 유혹에 넘어갔을지도 모릅니다. 설사 당시에 성욕이 일어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여자의 남은 인상은 언제가 마하띳사를 유혹에 빠지게 할 것입니다.
하지만 위빠사나 수행을 하며 닦은 뼈에 대한 관찰 덕분에 번뇌를 극복하고 윤회에서 벗어난 최종 해탈을 얻었습니다. 여기서 위빠사나를 통한 갈애의 소멸을 “부분적, 또는 일시적 소멸(tadanga-nibbuti)”이라고 하고 아라한과를 통한 갈애의 소멸을 “완전한 소멸”이라고 합니다.


PA¿ICCASAMUPPÆDA 43
43. CONTEMPLATION AND EXTINCTION
So with the total extinction of ta¼hæ that results from vedanæ, there is the extinction of upædæna which means the extinc tion of all the consequences of craving. Contemplation of anicca, dukkhæ and anatta ensures the partial extinction of ta¼hæ, upædæna, kamma, rebirth, etc. The object of vipassanæ practice is to put an end to defilements and samsæric suffering. So it is a matter of paramount importance that deserves the attention of everyone who seeks total liberation. Without this practice pleasant or unpleasant feeling at every moment of seeing, etc., is bound to lead to craving, kamma and rebirth.
The consciousness involved in every moment of seeing is due to avijjæ and sa³khæra in the previous existence. Seeing occurs together with viññæ¼a, naæmarþpa, æyatana, phassa and vedanæ.
The scriptures treats each of these dhammas separately in terms of their causal relations. But in fact they do not arise separately one after another. If viññæna arises from sa³khæra, it arises together with its respective næmarþpa, æyatana, phassa and vedanæ. All of these dhammas are the results of the past kamma sa³khæra. They are termed vipækavatta, which means round or cycle of resultants. The round of defilements viz., ignorance, craving and clinging produce round of kamma. viz., kamma and sa³khæra which leads to round resultants viz., consciousness, næma-rþpa, sense-organs, contact, feeling which again give rise to the round of defilements.
The arising of these five resultants at the moment of seeing means to most people simply just seeing. In fact seeing is the product of vaññæ¼a, næmarþpa, æyatana, phassa and vedanæ as are other psycho-physical events such as hearing, smelling and so forth.

Seeing involves consciousness together with mental advertence, (manasikæra) volition (cetanæ) etc., plus the eye-organ which comprise the næmarþpa. It also involves four æyatanas viz., eye sensitivity, visual object, eye consciousness and mental advertence (dhammæyatana). Contact with the visual object is phassa and the pleasantness or unpleasantness that the object causes is vedanæ. Hence all the five resultants are bound up with every moment of seeing. The same may be said of other phenomena that arise from hearing, smelling and so forth.

43. 관찰과 소멸
그리하여 느낌에서 생긴 갈애가 완전히 소멸되면 갈애의 모든 산물을 뜻하는 집착도 함께 소멸합니다. 무상• 고• 무아에 대한 관찰은 갈애, 집착, 업 등의 부분적 소멸을 보장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목적은 번뇌와 윤회고를 끝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는 완전한 해탈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주목할 만한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위빠사나 수행을 하지 않으면 보는 순간 마다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 갈애, 업, 재생에 이릅니다.
보는 순간과 관련된 식(識)은 전생의 무명과 상카라[行]에서 기인합니다. 보는 행위는 식(識), 여섯 감각장소[六入], 감각접촉[觸], 느낌[受]과 함께 일어납니다. 경장은 이러한 각각의 법들을 인과관계의 측면에서 따로 따로 다루고 있습니다만 실제로는 이들은 하나가 일어나고 다음 것이 개별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식이 상카라에서 일어날 때는 식은 그에 해당하는 정신-물질[名色]과 여섯 감각장소[六入]와 감각접촉[觸]과 느낌[受]과 함께 일어납니다. 이 법은 과거 상카라인 업의 과보입니다.
그들을 과보의 회전(vipāka-vaṭṭa)이라고 합니다. 또 무명, 갈애, 집착이라는 번뇌의 회전이 상카라, 즉 업의 회전(kamma-vaṭṭa)을 일으킵니다. 이 업의 회전은 식(識), 정신• 물질[名色], 여섯 감각장소[六入], 감각접촉[觸], 느낌[受]이라는 과보의 회전을 일으키고, 이 과보의 회전은 또 다시 번뇌의 회전(kilesa-vaṭṭa)142을 일으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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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번뇌의 회전(kilesa-vaṭṭa), 업의 회전(kamma-vaṭṭa), 과보의 회전(vipāka-vaṭṭa)은 존재가 윤회를 거듭하면서 돌고 도는 방식을 드러낸다. 여기서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회전은 번뇌의 회전(kilesa-vaṭṭa)이다. 무명으로 눈멀고 갈애로 인해 내몰려서 사람은 여러 가지 불선업과 선업을 짓는다. 그러므로 번뇌의 회전이 업의 회전을 일어나게 한다. 이 업이 성숙하면 그것은 다시 과보로 익게 되고 그래서 업의 회전은 과보의 회전을 일어나게 한다. 이들 과보에 대한 반응으로 이미 무명에 휩쓸려있는 사람은 더 즐거운 경험을 즐기려는 갈애에 압도되어 자기가 이미 가진 즐거움에 집착하고 괴로운 것은 버리려고 애쓴다. 그래서 과보의 회전은 또 다른 번뇌의 회전을 낳는다. 이와 같이 세 가지 회전은 그것의 토대가 되는 무명이 위빠사나의 지혜와 출세간의 도로 제거될 때까지 쉼 없이 계속 돌아간다.「청정도론」(Vis.XVII)은 이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세 가지 회전을 가진 존재의 바퀴는 쉼 없이 굴러간다. 여기서 상카라[行]와 존재[有]는 업(業)의 회전이고, 무명과 갈애와 집착은 번뇌의 회전이고, 식(識), 정신-물질[名色], 여섯 감각장소[六處], 감각접촉[觸], 느낌[受]은 과보의 회전이다. 세 가지 회전을 가진 존재의 바퀴는 번뇌의 회전이 끊어지지 않는 한 쉼이 없다. 왜냐하면 조건이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회전하면서 굴러간다고 알아야 한다.”
...................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보는 순간에 이 다섯 가지 과보143가 일어나는 것은 그냥 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실 보는 것은 식(識)과 정신• 물질[名色], 여섯 감각장소[六入], 감각접촉[觸], 느낌[受]의 과보이며, 이는 들음과 냄새 맡음 등의 다른 정신• 물질적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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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다섯 가지 과보란 (1) 기능(根 indriya) (2) 대상(境 visaya) (3) 식(識 vinñāṇa) (4) 감각접촉(觸 phassa) (5) 느낌(受 vedanā)이다. 이를 다섯 가지 법[五法]이라고도 한다. 보는 경우에는 눈[眼], 형상[色], 안식[眼識]의 세 가지가 서로 맞부딪쳐서 시각접촉, 즉 감각접촉[觸]이 일어나고 이 감각접촉[觸]으로 말미암아 느낌[受]이 생기는 것이다. 이러한 다섯 가지 법은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는 등의 다른 여섯 감각장소[六處]에도 마찬가지로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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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행위는 식(識), 주의 기울임[作意], 의도(cetanā), 그리고 정신• 물질로 이루어져 있는 눈의 기관[眼根]을 포함합니다. 보는 행위는 또 눈의 감성, 형상[色], 안식(眼識), 마노의 대상[法]이라는 네 가지 감각장소[處]도 포함합니다.
형상[色]과 맞부딪치는 것이 감각접촉[觸]이며, 그 대상이 불러일으키는 즐거움, 혹은 괴로움이 바로 느낌[受]입니다. 그러므로 다섯 가지 과보가 모두 봄의 모든 순간과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들음과 냄새 맡음 등에서 생기는 다른 현상에 대해서도 똑같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PA¿ICCASAMUPPÆDA 44
44. CUTTING OFF AT THE FOUNDATION
These five psycho-physical resultants or phenomena occur ceaselessly one after another and comprise what we call man, deva, or, living being. These are conventional terms that refer in fact to the collection of the five næmarþpa elements. There is no solid, monolithic and permanent being.
The only reality is the arising and passing away of næmarþpa and for the mindful yogø this insight means the extinction of craving, clinging, kamma, rebirth suffering a chain of consequences that might result from feeling in the case of common people.
This is the way to the cessation of the wheel of life (Pa¥iccasamuppæda) through the elimination of its key link viz., ta¼hæ as conditioned by feeling. In order to prevent ta¼hæ from arising as the result of vedanæ at every moment of seeing, the yogø should focus on every phenomenon that arises from six senses. Here the most obvious of these sense contacts is the tactile sensation that concerns gross primary elements (Mahabhþtæ) and it is necessary for the beginner to start contemplation with it.
This way is in accord with the Buddha’s teaching in Satipatthana sutta, “Gacchanto væ gacchæmiti pajanæti: (the yogø) knows that he is walking when he walks.” How does he know it? He knows it as he notes mentally “walking, walking” He practises mindfulness, too, when he stands, lies, bends his arms, or does anything else. When there is no bodily action or movement to be noted, he should direct his attention to the abdominal rising and falling. He should also note any thought, or mental activity and any feeling that may arise in him. In short, he must be mindful of all the psychophysical phenomena that arise from the six senses. As concentration develops, such mindfulness leads to insight into anicca, dukkha and anatta, an insight that leaves no room for craving. With the extinction of craving, there is also an end to clinging, and rebirth with all its attendant suffering. This is the way to the cessation of samsæric existence or lifecycle through the elimination of its rootcause-namely, craving.
Today science and technology have created machines which we cannot run or stop running without a knowledge of their modus operandi. Those who know its secret can operate them by manipulating their key plugs. In the same way the key-note of the life-cycle as described by the doctrine of Pa¥iccasamuppæda is that ta¼hæ is caused by vedanæ. But this is true only if vedanæ is coupled with two kinds of latent tendencies (anusaya) viz., Santænænusaya and ærammanænusaya.
The Arahats are free from these tendencies and so although they have feelings, their craving is extinct. This extinction of craving leaves no room for new kamma, neutralizes old kamma, and there is no more rebirth after their parinibbæna.
But ordinary people have potential defilements which means not the existence of evil desires lying latent somewhere but only the possibility of their arising under certain circumstances. Hence the Pæ¹i term santanænusaya kilesæ for this tendency. This potential kilesæ may become greed, hatred, ignorance and other evils in the case of those who fail to contemplate the næmarþpas and so become subject to the illusions of permanancy, happiness and ego-entity. This kilesæ which may arise from sense-objects in the absence of vipassanæ insight is called ærammanænusaya kilesæ.

44. 토대를 잘라냄
이 다섯 가지 정신-물질의 과보나 현상은 하나가 일어난 다음에 다른 하나가 끊임없이 일어나서 우리가 사람, 천신, 중생이라고 부르는 것을 구성합니다.
이것은 사실상 다섯 가지 정신-물질 무더기의 조합인 오온(五蘊)을 일컫는 관습적인 용어입니다. 견고한 단일체로서의 영원한 존재는 없습니다. 정신• 물질의 일어나고 사라짐만이 유일한 실재이며, 이러한 통찰지는 사념처 수행자에게 보통 사람들의 경우 느낌[受]에서 비롯되는 갈애[愛], 집착[取], 업, 재생의 괴로움이라는 과보의 사슬이 멈춤을 뜻합니다.
이것이 바로 느낌[受]을 조건으로 일어나는 갈애[愛]라는 핵심 연결고리를 제거함으로써 연기, 즉 삶의 수레바퀴를 멈추는 방법입니다. 보는 매 순간 느낌에서 갈애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수행자는 여섯 감각기관[六入]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주시해야 합니다. 여기서 이러한 감각접촉[觸]들 가운데 가장 분명한 것이 거친 근본요소[四大]와 관련된 몸의 감촉144이므로 초보자는 몸의 감촉을 관찰하는 것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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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감촉, 또는 좀 더 정확하게 몸의 감촉으로 옮긴 뽓따바(phoṭṭhabba)는 몸의 기능[身根]의 상대가 된다. 그리고 아비담마에서 감촉은 지(地), 화(火), 풍(風) 셋 중의 하나라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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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방법은 『중부』「염처경」(M10)에 나오는 부처님 말씀, 즉 “걸을 때 걷고 있음을 꿰뚫어 안다. gacchanto vā-gacchamiti pajanāti”와 일치합니다. 어떻게 알까요? 수행자는 정신적으로“걸음, 걸음”을 주시하여 압니다. 수행자는 서고, 눕고, 팔을 굽히거나 그 밖의 다른 동작을 할 때에도 사념처 수행을 합니다. 주시할 몸의 행위나 움직임이 없을 때에는 배의 일어남과 꺼짐에 주의력을 모아야 합니다.
자기 내면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생각, 정신 활동이나 어떠한 느낌도 주시해야 합니다. 요컨대, 수행자는 여섯 감각기관[六根]에서 일어나는 모든 정신-물질 현상을 반드시 알아차려야 합니다.
집중이 향상됨에 따라 그러한 알아차림은 무상• 고• 무아를 꿰뚫는 통찰지에 이르며 그 통찰지로 갈애가 생겨날 여지가 없게 됩니다. 갈애가 소멸함으로써 집착과 재생과 그에 뒤따르는 모든 괴로움도 끝이 납니다. 이것이 바로 근본 원인, 즉 갈애를 제거함으로써 윤회를 종식하는 방법입니다.
오늘날의 과학과 기술은 작동방법을 모르면 작동시키거나 멈출 수 없는 기계를 발명하였습니다. 그 비밀을 아는 사람만이 핵심 버튼을 조작해서 기계를 돌아가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식으로 윤회의 기본은 연기법에서 설명된 것처럼 느낌[受]을 원인으로 한 갈애[愛]지만 느낌[受]이 산딴아누사야(santānānusaya)와 알람만아누사야(ārammaṇānusaya)라는 두 가지 잠재성향(anusaya)145과 결부될 때만 해당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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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 잠재성향으로 번역한 아누사야(anusaya)는 ‘따라 누운’이라는 문자적인 뜻에서 무시(無始)이래로 중생의 잠재의식 속에 숨어 있는 성향을 말한다. 그래서 중국에서 수면(隨眠)으로 옮겼고 영어로는 underlining tendency, dormant disposition등이라 한다.
주석서에 “자기가 속해있는 정신적인 흐름에 따라 누워 있다가 적당한 조건을 만나면 표면으로 드러나는 번뇌이다.”라고 하듯이 이 아누사야(anusaya)는 언제라도 튀어 나올 준비를 갖추고 있다가, 적절한 자극이 가해지면 겉으로 표출되고 자극을 주는 힘이 사라지면 언제라도 다시 잠복 상태로 되돌아가 버린다. 즉 아누사야라는 번뇌는 출세간의 도에 의해 소멸하지 않는 한 언제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종류의 불선법(不善法)은 다 아누사야에 포함된다. 그중에서도 ➀ 감각적 욕망의 잠재성향(kāmarāgānusaya), ➁ 존재에 대한 욕망의 잠재성향(bhavarāgānusaya) ➂ 적의의 잠재성향(paṭighānusaya) ➃ 자만의 잠재성향(mānānusaya) ➄ 사견의 잠재성향(diṭṭhānusaya) ➅ 회의적 의심의 잠재성향(vicikicchānusaya) ➆ 무명의 잠재성향(avijjānusaya)의 7가지가 가장 두드러진 것이다.
「청정도론」(Vis.XXⅡ.73)은 이들 잠재성향이 어떻게 도에 의해서 버려지는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견의 잠재성향과 의심의 잠재성향은 첫째 지혜(예류도의 지혜)로 버린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잠재성향과 의심의 잠재성향은 둘째 지혜(일래도의 지혜)로 버린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잠재성향과 적의의 잠재성향은 세째 지혜(불환도의 지혜)로 버린다. 자만의 잠재성향과 무명의 잠재성향은 네 번째 지혜(아라한도의 지혜)로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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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한은 이러한 잠재성향에서 벗어났으며 그래서 비록 아라한이 느낌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갈애는 소멸됩니다. 이렇게 갈애가 소멸되면 새로운 업이 일어날 여지가 없고 과거의 업은 중화되고 완전한 열반[般涅槃]에 든 다음에는 더 이상의 재생이 없습니다.
하지만 범부는 어딘가에 잠복해 있는 악한 욕망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 놓이게 되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뜻하는 잠재성향의 번뇌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경향성을 일러 빨리어로 산딴아누사야 낄레사(santānānusaya-kilesa), 즉 오온(五蘊)의 흐름에 잠재해 있는 번뇌라고 합니다.
이러한 잠재성향의 번뇌는 정신-물질을 관찰하지 못하는 사람의 경우 탐욕, 성냄, 어리석음과 다른 불선법으로 변해서 항상 하고, 행복하고, 자아가 있다는 전도된 인식에 놀아나게 만듭니다.
위빠사나 지혜가 없이 감각대상을 접하면 이러한 번뇌가 일어나고, 이것을 빨리어로 알람만아누사야 낄레사(ārammaṇānusaya-kilesa), 즉 감각대상에 잠재하는 번뇌라고 합니다.


PA¿ICCASAMUPPÆDA 45
45. KILESÆ AND UNMINDFULNESS
Greed and anger that arise in connection with what one has seen or heard are the manifestations of the second kind of latent tendency. The impressions that we retain are those of permanent, lovely or repulsive beings or things. So recall of those images give rise to attachment (lobha), anger (dosa) or illusion of permanency (moha).
Lobha is another synonym for ta¼hæ. It is due to pleasant feeling but it may also arise when unpleasant feeling makes us crave for pleasant sensations. Ignorance, too, leads to complacency, attachment and craving. Thus lobha, dosa and moha give rise to feeling which in turn causes craving with its attendant sufferings of samsæric existence. It is only the practice in bare awareness of seeing, hearing etc that rules out the possibility of craving and nostalgia for the pleasant sensations from the senses. Without this practice, craving dominates us and leads to suffering in afterlife as well as here and now.
In the Mora jætaka the bodhisatta who was then a peacock used to utter a gæthæ when he arose in the morning and when he went to sleep in the evening. So for 700 years he escaped the trap set by a hunter. Then the hunter employed a pea-hen as a decoy and enticed by her, the pea-cock forgot to recite the gæhtæ and fell into the trap. In Benares there was a harpist called Guttila. He made love to a girl but he was ridiculed and rejected. So at night he sang a very sweet song and played his harp in front of the girl’s house. Fascinated by the music, the girl rushed out blindly, stumbled and fell to her death. In the Mora jætaka it was the female voice and here it was the male voice that brought about suffering and death.
No one can deny that what we hear is impermanent. Everything that we hear vanishes instantly, yet we enjoy songs and music because of their apparent continuity. If we note every sound, “hearing” “hearing” mentally, our realization of their impermanence makes it impossible for our pleasant feelings to become cravings. This means non-arising of upædæna and all its resultant suffering.
Smell is seldom experienced by the yogø. He must of course note it and see that it does not give rise to craving.
Mindfulness is especially important in eating. The unmindful person delights in eating good food. He is fond of such pleasure; he craves for it in future and hereafter. This craving for good food and drinks is powerful. It may lead to an existence that makes a person subsist on bad food. Thus according to the Balapandita sutta those who do misdeeds for the pleasure of good food are reborn as animals that eat grass, leaves or human excreta.
Eating bad food also tends to create the desire for good food. Therefore it is necessary for the yogø to note everything, every movement of his hand, and mouth and every sensation when he is eating. Through this practice of mindfulness, he becomes aware of the vanishing of his actions, sensations and feeling. In this way he gains an insight into impermanence of everything, an insight that leads to the extinction of craving and its attendant suffering.

45. 번뇌와 알아차리지 못함
보거나 들은 것과 관련하여 일어나는 탐욕과 성냄은 두 번째 잠재성향이 발현된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인상은 항상 하거나 사랑스럽거나 혐오스러운 존재나 사물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상을 떠올리면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생겨납니다.
탐욕은 갈애의 다른 이름입니다. 탐욕은 즐거운 느낌에서 비롯하지만 괴로운 느낌 때문에, 우리가 즐거운 감각을 갈망할 때 생기기도 합니다. 어리석음도 자기만족, 애착, 갈애를 가져옵니다.
그렇게 탐욕, 성냄, 어리석음은 느낌[受]을 일으키고 그 느낌은 갈애와 그에 뒤따르는 윤회고를 일으킵니다. 오로지 봄, 들음 등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수행만이 감관의 즐거운 느낌에 대한 갈애와 그리워하는 마음이 일어날 가능성을 차단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수행을 닦지 않으면 갈애가 우리를 지배하고 지금 여기와 내생의 괴로움에 이르게 합니다.
「모라 본생경(Mora Jātaka)」(J.159)에서 공작이었던 보살은 아침에 일어날 때와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 호주(護呪)를 읊곤 했습니다. 그렇게 했기 때문에 공작은 700년 동안 사냥꾼이 놓은 덫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사냥꾼은 암공작을 미끼로 썼고 그 암공작에게 홀린 공작은 게송을 읊는 것을 잊고는 그만 덫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증지부』주석서(AA.i.16f)에 따르면 베나레스(Benares)에 굿띨라(Guttila)146라는 하프연주자가 소녀에게 사랑을 고백했지만 거절 당했습니다. 그러자 굿띨라는 소녀의 집 앞으로 가서 아주 감미로운 노래를 부르며 하프를 연주하였습니다. 음악에 도취된 소녀는 무턱대고 달려 나오다가 발부리가 걸려 넘어져 죽었습니다. 괴로움과 죽음을 야기한 것은「모라 본생경」에서는 여자의 목소리였고 『증지부』주석서에서는 남자의 목소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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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증지부』주석서(AA.i.16f)에 나오는 굿띨라(Guttila)와「굿띨라 본생경(Guttila Jātaka)」(J.243)에 나오는 굿띨라와는 아마도 다른 사람인 듯하다. 왜냐하면 본생경에 나오는 굿띨라는 눈먼 노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일부러 결혼하지 않은 악사로 나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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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듣는 것이 무상하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합니다. 듣는 모든 것은 그 즉시 사라지지만 우리는 연속성 때문에 노래와 음악을 즐깁니다. 우리가 모든 소리를 “들음” “들음”이라고 정신적으로 주시하면 소리의 무상을 깨닫게 되기 때문에 즐거운 느낌이 갈애로 전환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집착과 모든 그 과보인 괴로움이 일어나지 않음을 뜻합니다.
수행처는 특별한 냄새가 나는 환경이 아닙니다만 수행자는 냄새를 주시하고 갈애가 일어나지 않음을 봅니다.
먹을 때의 알아차림은 매우 중요합니다. 알아차림이 없는 사람은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즐거워합니다. 그러한 즐거움을 좋아하고 앞으로 내생에도 그 즐거움을 갈구합니다. 맛있는 음식에 대한 갈애는 강력합니다. 이는 나쁜 음식을 먹고 사는 존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중부』「우현경(愚賢經 Bālapaṇḍita Sutta)」(M129)에 따르면 맛있는 음식을 먹는 즐거움 때문에 악한 행동을 한 사람은 풀과 잎사귀, 또는 사람 똥을 먹고 사는 축생으로 태어난다고 합니다.
맛없는 음식을 먹는 것도 맛있는 음식에 대한 갈애를 유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먹을 때 손과 입의 모든 움직임과 모든 감각을 주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알아차림 수행으로 수행자는 자기 행동, 감각, 느낌을 알게 됩니다. 수행자는 이러한 방식으로 모든 것의 무상을 꿰뚫어 보고, 갈애와 그 갈애에 뒤따르는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통찰지를 얻습니다.


PA¿ICCASAMUPPÆDA 46
46. THOUGHTS AND TACTILE IMPRESSIONS
Tactile impression is aways present all over the physical body. Thinking, too, is also present all the time except when the yogø goes to sleep. So thoughts and tactile impressions form the objects of vipassanæ practice for most of the time. The yogø contemplates the tactile impressions when he has nothing else to engage his attention.
He notes his thoughts even though the y happen to be unpleasant and undesirable. The beginner in meditation is often subject to such distractions, but they usually disappear as he gains practice and develops concentration. Thoughts about the Dhamma occur to some yogøs from time to time and these should be noted. Introspection of these thoughts also ensures insight into impermanence and the extinction of suffering.
Here some may wonder what this description of vipassanæ practice has to do with the discourse on Pa¥iccasamuppæda. The doctrine points out the chain of consequences as conditioned by their respective causes and our object is to show the way to the end of samsæric suffering that finally results from the interplay of these causes and consequences. So we have to describe the practice wherever it is relevant. Thus when it is said that “avijjæ leads to sa³khæra and sa³khæra to rebirth” we have to show the way to remove avijjæ. So also in connection with viññæ¼a, etc., that finally bring about dukkha, it is necessary to stress the need for removing the link between vednæ and ta¼hæ that is the maincause of dukkha.

46. 생각과 감촉
감촉은 몸에 골고루 퍼져 있습니다. 생각도 수행자가 잠들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각과 감촉은 대개 위빠사나 수행의 관찰 대상이 됩니다. 수행자는 달리 주시할 것이 없으면 몸의 감촉을 관찰합니다.
수행자는 비록 생각이 즐겁지 않거나 달갑지 않더라도 주시합니다. 수행 초보자는 망상이 아주 많지만 수행이 깊어지고 집중이 향상되면 으레 사라집니다. 어떤 수행자에게는 법에 대한 생각이 가끔씩 떠오르는데 이것도 주시해야 합니다. 이러한 생각에 대한 내관은 또한 무상을 꿰뚫어 보는 통찰지와 괴로움의 소멸을 약속합니다.
연기에 대한 법문과 위빠사나 수행에 대한 설명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의아해 할 수도 있습니다. 연기법은 각 원인을 조건으로 생기는 결과의 사슬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목적은 이러한 원인과 결과의 상호작용에서 생긴 윤회의 고통을 어떻게 끝낼 수 있는가 하는 방법을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필요할 때는 언제나 연기법을 이야기 합니다.
예를 들어 “무명은 상카라에 이르고, 상카라는 재생에 이른다.”라고 할 때, 무명을 제거하는 방법을 보여줘야만 합니다. 그리고 또한 결국엔 괴로움을 초래하는 식 등과 관련해서는 괴로움의 주된 원인인 갈애[愛]와 느낌[受]사이의 연결고리를 제거해야 함을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PA¿ICCASAMUPPÆDA 47
47. THREE KINDS OF CRAVING (TA¤HÆ)
If feeling (vedanæ) that arises from contact with sense-objects is not rightly contemplated, it leads to one of the three kinds of craving viz., craving for sensual pleasure, craving for existence and craving for non-existence. The first kind of craving (kæmata¼hæ) is focussed on sensual objects and it is most prevalent among the living beings of the sensual world.
The craving for existence (bhavata¼hæ) is bound up with the eternity-belief (sassata-di¥¥hi). It presupposes the permanence of a living being, and the indestructibility of the ego despite the dissolution of the physical body. The belief is not deep-rooted among the Buddhists. But non-Buddhists hold it so firmly that it is a major impediment to their spiritual liberation. Their craving for existence is evident in their illusion of permanent self and their love of sensual pleasure.
The craving for non-existence (vibhava-ta¼hæ) is born of the annihilation belief (ucchedadi¥¥hi). The belief is not found among Buddhists and no one is a true Buddhist if he or she holds the belief. The craving for non-existence means the desire for the automatic cessation of the life-stream after death as well as the love of pleasure rooted in the materialistic view of life.
Each of these three cravings stems from the failure to realize anicca, dukkha and anatta through the introspection of feelings. So in order to forestall craving and its consequences, namely, rebirth and suffering, the yogø should contemplate every phenomenon and try to see everything as it really is.

47. 세 가지 갈애
감각대상과 맞부딪쳐서 일어나는 느낌[受]을 바르게 관찰하지 않으면 (1)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 (2)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3) 비존재에 대한 갈애[無有愛]라는 세 가지 갈애가 일어납니다.
(1)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는 감각적 대상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욕계중생에게 가장 보편적인 것입니다.
(2)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는 상견(常見)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상견은 중생은 영원하고 육신이 무너지고 난 뒤에도 자아는 불멸한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불교인들에게 상견은 뿌리 깊지 않지만, 불교도가 아닌 사람들은 대부분 이러한 상견을 집착하기 때문에 정신적인 자유에 주된 장애입니다.
대개 비불교인들이 가지는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영원한 자아에 대한 전도된 인식과 감각적 쾌락에 대한 사랑을 보면 명백히 알 수 있습니다.
(3) 비존재에 대한 갈애[無有愛]는 단견(斷見)에서 비롯됩니다. 불교인들 가운데 이 단견을 지닌 사람은 없는데, 만약 이를 가지고 있다면 진정한 불교신자가 아닙니다. 비존재에 대한 갈애[無有愛]는 죽은 다음에는 생명의 흐름이 자동적으로 끝나기를 바라는 욕망과 유물론적인 인생관을 토대로 하는 쾌락에 대한 사랑을 뜻합니다.
이 세 가지 갈애는 느낌을 내관하여 무상• 고• 무아를 깨닫지 못한데서 비롯됩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갈애와 그 결과인 재생과 괴로움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현상을 관찰하여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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