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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글 제목: (Mahāsi Sayādaw)56~65
전체글올린 게시글: 2015-12-30, (수) 12:35 am 

가입일: 2015-01-30, (금) 10:13 pm
전체글: 103
PA¿ICCASAMUPPÆDA 56
56. ATTAVÆDUPÆDÆNA (CLINGING TO BELIEF IN SOUL)
Attavædupædæna is a compound of attavæda and upædæna. Attavæda means belief in-soul entity and atta vædupædæna is attachment to the view that every person is a living soul.
Attachment to the ego-belief is of two kinds, viz, ordinary attachment and deep-rooted attachment. Ordinary attachment that prevails among ignorant Buddhists is not harmful to progress on the holy path. The belief is not deeply entrenched because Buddhists accept the Buddha’s teaching which denies the permanent soul and recognizes næma-rþpa as the only reality behind a living being. Intelligent Buddhists are still less vulnerable to the belief. For they know that seeing, hearing, etc., involve only the sense-organs (eye, ear, etc.), the corresponding sense-objects (visual form, sound etc.,) and the corresponding states of consciousness.
But most people are not wholly free from the ego-belief. Even the yogø who practices vipassanæ may at times fall for it and it is likely to attract every man who has not attained the holy path.
In fact those who taught ego-belief described the ego as the owner of the five khandhæs, as an independent entity, possessing free-will and self-determination It was this view of atta (soul) that the Buddha questioned in his dialogue with the wandering ascetic Saccaka. Said the Buddha, “You say that this physical body is your atta. Them can you always keep it well, free from anything unpleasant?”, Saccaka had to answer in the negative. Further questioning by the Lord elicited from him the reply that he had in fact no control over any of the five khandhæs.
So the ancient Buddhist teachers translate “rþpam anatta” as “the physical body is subject to no control”, etc. In fact it is the denial of the “sæmøatta” or the false view of atta as a controlling entity. Every ordinary person holds this view and believes in free-will. He can overcome it completely only through vipassanæ contemplation.
The attavæda teachers also say that atta exists permanently in the physical body. In other words, it means the personal identity that is aid to persist through the whole existence.

Again, they say that atta is the subject of all actions, thus identifying it with sa³khærakkhandhæ. It is the illusion that creates the belief. “It is I that see, hear etc.” They also say that atta is the living entity that feels; that it is atta that is happy or unhappy. In other words, they describe, atta or, soul in terms of vedanæ or feeling.
Thus although the Atmanists (attavædøs) insist that atta has nothing to do with the five khandhæs, they credit it with ownership of the body, etc., permanent residence in the body, subjectivity and feeling: and hence in effect they identify it with the five khandhæs. The ego- illusion is rooted in the khandhæs and a man can free himself completely from it only when he becomes aware of the real nature of khandhæs through contemplation.
Of the four upædæna, the first upædæna, (clinging to sensuality) is the developed form of craving. (ta¼hæ). The other three upædænas differ only as regards their objects; basically they all relate to beliefs, viz., belief in ego, belief in the efficacy of practices other than those of the eightfold path, and any false belief other than those in the category of the other two upædæna. All false beliefs arise in connection with craving. Men cling to a belief because they like it. Thus there is no doubt that all the four upædænas stem from craving and hence the Buddha’s teaching: “From ta¼hæ there arises upædæna.”
In point of fact, craving is the cause and clinging is the effect. Craving for sensual pleasure, the ego belief, or the practices irrelevant to the holy path or other false beliefs is the cause and this craving develops into clinging to sensuality, ego-belief, etc, and thus becomes effects.

56. 자아의 교리에 대한 집착
자아의 교리에 대한 집착(atta-vāda-upādāna)은 아따와다(atta-vāda)와 우빠다나(upādāna)의 합성어입니다. 아따와다(atta-vāda)는 자아의 교리, 즉 영혼의 실재에 대한 믿음을 뜻하기 때문에 아따와다우빠다나(atta-vāda-upādāna)는 바로 모든 사람은 살아있는 영혼이라고 보는 견해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자아의 교리에 대한 집착은 일반적인 집착과 깊게 뿌리박힌 집착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어리석은 불교신자들에게 팽배해있는 일반적인 집착은 성스러운 도를 닦아가는 데 해롭지는 않습니다. 불교신자는 영원한 영혼을 부정하고 정신-물질만이 중생에 내재하는 유일한 실재로 인정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자아의 교리는 깊게 뿌리박혀 있지 않습니다.
지혜로운 불교신자는 더 더욱 이 자아의 교리에 빠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보고 듣는 것은 오직 눈(眼)과 귀[耳]의 감각기관들, 그에 상응하는 형상[色]과 소리[聲]의 감각대상들,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안식(眼識), 이식(耳識)과 서로 결부되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신견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합니다. 위빠사나를 닦는 수행자도 때로는 유신견에 빠질 수 있으며, 성스러운 도를 얻지 않은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사실 유신견을 가르쳤던 사람들은 자아를 자유의지와 스스로의 결정권을 지닌 오온(五蘊)의 주인으로, 독립적인 실재로 설명했습니다. 『중부』「짧은 삿짜까경(Cūla-Saccaka Sutta)」(M.i.227ff)에서 부처님께서 유행승(遊行僧)159 삿짜까(Saccaka)와의 대화 속에서 물으신 것도 바로 이 유신견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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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 유행승(遊行僧)으로 옮긴 빠리바자까(paribbājaka)는 부처님 제자를 제외하고 집을 떠나 수행하는 출가사문들을 통칭하는 말이다. 영어로는 wondering ascetic이라고 한다. 그래서 『중부』주석서(MA.ii.7)에서는 “재가의 속박을 버리고 출가한 자”라고 설명하고 있다. 한편 사명외도(邪命外道 Ājīvika), 니간타(Nigantha), 나체 수행자의 무리 등은 paribbājaka라고 표현하지 않고 그들에 해당하는 이름을 부르고 있으며 그 외에 별다른 특징이나 큰 집단을 이루지 않은 일반 출가자를 이렇게 부르고 있다. 한편 경에서 비구들의 출가를 빱빳자(pabbajjā)라 표현하여 일반 유행자에 관계된 빠리바자까(paribbājaka)라는 이 용어와는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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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 몸이 너의 자아라고 하는데 그러면 이 몸을 항상 잘 간수하고 즐겁지 못한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할 수 있느냐?” 삿짜까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습니다. 세존께서는 계속해서 질문 하셔서 사실상 오온 중의 어느 것에 대한 통제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답변을 유도하셨습니다.
그래서 옛 불교스승들은 “물질은 무아다, rūpam anatta"를 “육체적 몸은 통제를 받지 않는다.”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사실 이는 통제하는 실재로서의 자아(sāmīatta)에 대한 그릇된 견해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모든 범부들은 다 이 견해를 지니고 있으며 자유의지를 믿습니다. 오직 위빠사나 관찰을 통해서만 이러한 견해를 완전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자아에 대한 교리(atta-vāda)를 가르치는 스승들은 자아가 육체적인 몸에 영원히 존재한다고 설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는 전 존재의 일생에 걸쳐 지속한다고 하는 개체의 동일성을 뜻합니다.
게다가 그들은 자아란 모든 행위의 주체라고 하고 상카라의 무더기[行蘊]와 동일하게 봅니다. 이는 “보고 듣는 것은 나이다.”라는 믿음을 일으키는 전도된 인식입니다. 그들은 또한 자아는 느끼는 살아있는 실재이며 행복해하거나 불행해하는 것은 자아라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은 자아, 즉 영혼을 느낌[受]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비록 자아의 교리를 주장하는 자(atta-vādī)가 자아와 오온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더라도 자아를 몸의 주인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즉 자아는 몸 안에 영원히 머물고 있고, 주관자이며, 느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상 그들은 자아를 오온(五蘊)과 동일하게 여깁니다. 자아에 대한 전도된 인식은 오온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관찰을 통해서 오온의 진정한 본성을 알게 될 때에만 비로소 그러한 전도된 인식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습니다.
네 가지 집착 가운데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kāmā-upādāna)은 갈애(taṇhā)의 발전된 형태입니다. 다른 세 가지 집착은 그들의 대상에 따라 다를 뿐입니다. 이러한 집착은 기본적으로 유신견, 팔정도 이외의 수행이 효율적이라는 믿음, 다른 두 가지 집착(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과 사견에 대한 집착)의 범주에 드는 수행 이외의 모든 그릇된 믿음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릇된 믿음은 갈애와 관련되어 일어납니다. 사람은 그렇게 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믿음에 집착합니다. 그래서 네 가지 집착은 의심할 여지없이 갈애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일어난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실, 갈애가 원인이고 집착이 그 결과입니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 유신견, 또는 성스러운 도와 무관한 수행이나 다른 그릇된 믿음이 원인이고 이 갈애는 감각적 쾌락, 유신견등에 대한 집착으로 발전하기 때문에 결과가 됩니다.


PA¿ICCASAMUPPÆDA 57
57.CLINGING LEADS TO BECOMING
Upædæna leads to bhava (becoming). There are two kinds of bhava, viz, kamma bhava and upæpatti bhava.

(1) KAMMA BHAVA
Kamma bhava means the kamma that leads to rebirth. The Buddha describes it as the puññæbhi, apuññæbhi and æneñjabhi sa³khæras that lead to lower sensual world or the higher material and immaterial worlds. He also identifies kamma bhava with all kammas that give rise to new existence.
Of the three sa³khæras, puññæbhi sa³khæra comprises the eight wholesome volitions (cetanæ) in sensual sphere and five wholesome volitions in the material (rþpa) sphere. Apuññæbhi sa³khæra is the group of twelve unwholesome volitions. Aneñjæbhi sa³khæra means the four wholesome volitions in immaterial sphere. Also leading to rebirth are the kammas that arise together with the wholesome volitions in sensual sphere. viz., having no covetous thoughts or designs about another’s possession, having no design against another person’s life and holding right views. These kammas are implicit in puññæbhisa³khæra. In short, kammabhava is the good or bad volition that leads to rebirth.

(2) Upapattibhava.
Upapattibhava is of nine kinds. (1) kammabhava means the nämarþpas of living beings in the sensual world. In other words, kammabhava refers to existences in the hell and the worlds of devas, mankind, animals and petas. (2) rþpabhava - -the khandhæs of brahmas with no rþpas. (3) arþpabhava the næmakhandhæs of bramas with no rþpas. (4) saññibhava-næmarþpas of beings with gross perceptions, that is beings in 29 abodes other than asaññi nevasaññi abodes. (5) asaññribhavanæmarþpa- of asaññi-brahmas. (6) Nevasaññinasaññi-næma khandhæs of higher brahmas (7) ekavokærabhava- the bhava with only rþpekkhndha. (8) catuvokærabhava-the bhava with four namakhandhas. (9) pañcavokarabhava-of bhava with five næmarþpakkhandhæs.
In short, upapattibhava means the næmarþpas of the new existence that results from kamma.
It comprises the viññæ¼a, næmarþpa, salhayatana, phassa and vedanæ. The bhava that arises from upædæna is basically kammabhava, the other upapatti bhava being merely its by-product.
From contact with six pleasant or unpleasant sense-objects there arise six pleasant or unpleasant feelings. Feelings lead to craving and craving develops into clinging, clinging to sensual objects may become excessive to the point of craving for union with one’s family in a future life or attainment of Nibbæna hand in hand with one’s beloved. The excessive degree of a man’s upædæna is evident in the story of the merchant Mendaka.

57. 집착[取]을 조건으로 존재[有]가 일어난다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일어납니다. 존재(有 bhava)에는 (1) 업으로서의 존재(業有 kamma-bhava)와 (2) 재생으로서의 존재(生有 upāpatti-bhava)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업으로서의 존재(業有 kamma-bhava)
업으로서의 존재[業有]는 재생에 이르는 업을 뜻합니다.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낮은 욕계나 높은 색계와 무색계에 이르는 ① 공덕이 되는 행위(puñña-abhisaṅkhāra) ②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apuñña-abhisaṅkhāra) ③ 흔들림 없는 행위(aneñja-abhisaṅkhāra)로 설명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업으로서의 존재[業有]를 새로운 생이 일어나게 하는 업과 동일하게 보셨습니다.
이 세 가지 행위 중 공덕이 되는 행위(puñña-abhisaṅkhāra)는 욕계에서의 여덟 가지 선한 의도(cetanā)와 색계에서의 다섯 가지 선한 의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apuñña-abhisaṅkhāra)는 12가지 불선한 의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apuñña-abhisaṅkhāra)는 무색계에서의 네 가지 선한 의도를 뜻합니다.
또 재생에 이르게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재산에 대해 탐내는 생각이나 의도, 다른 사람의 삶을 해치려는 의도가 없으며, 바른 견해[正見]을 가지고 있는 색계의 선한 의도와 함께 일어나는 업들입니다.
이러한 업은 공덕이 되는 행위(puñña-abhisaṅkhāra)에 내재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업으로서의 존재[業有]는 재생에 이르는 선하거나 악한 의도입니다.

(2) 재생으로서의 존재(生有 upāpatti-bhava)
재생으로서의 존재[生有]는 9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① 욕계 중생의 정신-물질을 뜻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재생으로서의 존재[生有]는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천신계의 존재를 가리킵니다. ② 색계존재(色界有 rūpa-bhava)는 물질[色]이 없는 범천의 오온(五蘊)입니다. ③ 무색계존재(無色界有 arūpa-bhava)는 물질[色]이 없는 범천의 정신 무더기[名蘊]입니다. ④ 인식을 가진 존재(想有 saññi-bhava)는 거친 인식[想]의 존재, 즉 무상유정천과 비상비비상천을 제외한 29가지 존재들의 정신-물질입니다.
⑤ 무상유정의 존재(無想有情有 asaññri-bhava)는 무상유정천의 정신-물질입니다. ⑥ 비상비비상의 존재(非想非非想有 nevasaññinasaññi-bhava)는 가장 높은 범천의 정신 무더기의 존재입니다. ⑦ 하나의 무더기를 가진 존재(一蘊有 ekavokāra-bhava)는 물질의 무더기[色蘊]뿐인 존재입니다. ⑧ 네 무더기를 가진 존재(四蘊有 catuvokāra-bhava)는 네 가지 정신의 무더기[名蘊]의 존재입니다. ⑨ 다섯 무더기를 가진 존재(五蘊有 pañcavokara-bhava)는 오온으로 구성된 존재입니다.
요컨대, 재생으로서의 존재[生有]는 업에서 비롯된 새로운 생의 정신-물질[名色]을 뜻합니다. 그것은 식(識), 정신-물질[名色], 여섯 감각장소[六入], 감각접촉[觸], 느낌[受]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집착[取]에서 일어나는 존재[有]는 기본적으로 업으로서의 존재[業有]이며, 재생으로서의 존재[生有]는 업으로서의 존재[業有]의 부산물일 뿐입니다.
즐겁거나 괴로운 여섯 감각대상[六境]과 맞부딪쳐서 즐겁거나 괴로운 여섯 느낌[受]이 일어납니다. 느낌[受]은 갈애[愛]를 일으키고 갈애[愛]는 집착[取]으로 발전하며, 감각 대상에 대한 집착이 너무 지나치면 내생에 한 집안사람들이 함께 만나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손을 잡고 열반을 함께 성취하려는 갈애까지 이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지나친 집착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은 멘다까(Meṇḍaka) 장자의 이야기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PA¿ICCASAMUPPÆDA 58
58. STORY OF MENDAKA
Mendaka was a rich merchant in a previous life. In the face of a famine, his stock of provisions gradually ran out and at last he had to send away his attendants and was left with his wife, a son, his daughter- in- law and a slave. His wife having cooked rice that was barely enough for their consumption, they were about to eat it when a paccekabuddha appeare to receive food.
At the sight of the paccekabuddha, the merchant thought of his bad kamma, that is, lack of dæna in a previous life that had now brought about his starvation. He then offered his share of rice to the paccekabuddha and prayed for abundant supply of food and reunion with the members of his household in his future lives. His wife, too, donated her share of rice and expressed a similar wish in her prayer. The son and his wife followed suit and prayed in the same vein, that is, for unlimited supply of food, and money as well as reunion with the same wife, husband, parents and slaves.
The prayers of the merchant and his family clearly point to the powerful influence of upædæna in the sensual sphere and most people today are no less subject to the same kind of attachment. But more appalling is the upædæna of the slave Pu¼¼a. After offering his share of rice, he prayed for abundance of food and rebirth as the slave of the same family! It never occurred to him to pray for rebirth as a king or a merchant; his attachment to his masters and mistress was so strong that he wanted only to be their slave hereafter.
Once there was a village headman who stood well with Government officials. Those were the days when under British rule most of the high ranking officials were Englishmen. The headman took much delight in paying respect to them. He said that he enjoyed saying, phayæ, “Yes, my Lord,” when was called by an officer. His attachment was essentially the same as that of Pu¼¼a.
The paccekabuddha blessed them and departed. By means of his psychic power they saw him fly back to the Himalayas and share the food with five hundred other fellow-Buddhas. On that very day the merchant and his family found their acts of dæna being fruit wonderfully. They found the rice pot full of rice. They ate to their hearts, content but the pot was always full of rice. They found their granaries, too, overflowing with grains.
Their prayers were fulfilled in the life-time of the Buddha-Gotama for they became members of the same household in Baddiya, a city of the Magadha country. The news of the fulfillment of their prayers was so unusual and amazing that the king made an inquiry through a minister and found that it was indeed true. This story is mentioned in Vinaya pi¥aka.

58. 멘다까 이야기
멘다까는 전생에 부유한 장자였습니다. 기근이 닥치자 비축해둔 양식은 점차 줄어들어 마침내 시종들을 모두 내보내야 했고, 나중에는 부인과 아들, 며느리, 머슴 한 명만 남았습니다. 멘다까의 아내는 그들이 먹기에만 겨우 충분한 밥을 지은 후 막 그 밥을 먹으려던 찰나 벽지불이 탁발을 하러 왔습니다.
벽지불을 보자 장자는 전생에 보시를 소홀히 하여 현생에 배고픔으로 허덕이게 된 자신의 악업을 떠올렸습니다. 장자는 벽지불에게 자신의 몫인 밥을 보시하고 음식의 풍족함과 내생에도 가족들과 함께하기를 기원하였습니다. 장자의 아내도 자신의 밥을 보시하고 비슷한 기원을 하였습니다. 그 아들과 며느리도 따라서 보시하면서 양식과 돈의 다함이 없는 공급과 같은 아내, 남편, 부모와 머슴들이 다시 상봉하기를 기원했습니다.
장자와 그 가족의 기원은 욕계의 강렬한 집착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도 같은 집착에 얽매어 있습니다. 하지만 보다 섬뜩한 것은 머슴 뿐나의 집착입니다. 자신의 밥을 보시하면서 뿐나는 음식의 풍족함과 함께 내생에도 지금의 집안에 머슴으로 태어나게 해달라고 빌었던 것입니다. 그는 왕이나 장자로 다시 태어나고픈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의 주인과 주인마님에 대한 집착은 너무나도 강해서 내생에도 오로지 그들의 머슴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한때 정부 관리에게 평판이 좋았던 촌장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의 미얀마는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때라서 대부분의 고위 관리들은 영국인이었습니다. 촌장은 그들에게 경례하는 것을 무척이나 즐거워했습니다. 촌장은 관리가 자신을 부를 때 "예, 주인님(phayā)”하고 답하는 것이 즐겁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집착은 본질에 있어 뿐나의 집착과 같습니다.
벽지불은 그들을 축원해주고 떠났습니다. 벽지불의 신통력으로 그들은 벽지불이 히말라야로 날아가서 다른 500명의 벽지불들과 음식을 나누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로 그날 장자와 그 가족들은 자신의 보시행이 놀라운 과보를 맺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쌀독이 쌀로 가득 찼고, 만족할 때까지 먹어도 쌀은 언제나 넘쳐 났습니다. 또 곡물 창고도 곡식으로 가득 차 넘치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고따마 부처님 당시에 마가다국160의 밧디야(Baddiya)시에서 똑같은 가족 구성원이 됨으로써 그들의 기도는 성취되었습니다. 그들의 기도가 성취되었다는 소식은 너무나도 신기하고 놀라운 것이어서 왕은 대신에게 조사해 보도록 하였고 그것은 정말로 사실임이 판명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율장에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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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 마가다(Magadha)는 부처님 당시 인도 중원의 16국 가운데서 꼬살라(Kosala)와 더불어 가장 강성했던 나라이며 결국은 16국을 통일한 나라이다. 수도는 라자가하(Rajāgaha)였으며 빔비사라(Bimbisāra) 왕과 그의 아들 아자따삿뚜(Ajātasattu)가 부처님 재세 시에 왕위에 있었다. 이 마가다국이 나중에 인도를 통일한 마우리야(Maurya) 왕조로 발전이 되었다. 부처님께서는 이 마가다지방의 언어인 마가디로 법을 설하셨고 상좌부에서는 이 마가디가 바로 빨리어라고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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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ICCASAMUPPÆDA 59
59. UPÆDÆNA AND KAMMABHAVA
When the sensual desire for an object develops into an int ense craving, a person becomes desperate and tries to secure it by fair means or foul. Thefts, robberies, frauds, murders and so forth that are rampant nowadays stem from upædæna. Some crimes are rooted in sensual upædæna while others arise from one of the three kinds of illusion based on upædæna. People commit their crimes not only because of their unwholesome desires but also because of their blind attachment to wives, husbands, etc. The following is a story illustrative of the evil kammabhava resulting from sensual upædæna.

59. 집착[取]과 업으로서의 존재[業有]
한 대상에 대한 감각적 욕망이 강렬한 갈애로 발전하면, 사람은 필사적이 되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것을 손에 넣고자 합니다. 오늘날 만연하고 있는 도둑, 강도, 사기행각, 살인 등은 집착에서 비롯됩니다.

어떤 범죄는 감각적인 집착에 뿌리를 두고 있고 또 어떤 범죄는 집착에 토대를 둔 세 가지 전도된 인식 중의 하나에서 비롯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불선한 욕망뿐 아니라 아내나 남편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 때문에 범죄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다음에 나오는「뿝파랏따 본생경(Puppharatta Jātaka)」(J.147) 이야기는 감각적 집착에서 비롯되는 불선한 업으로서의 존재[業有]를 입증하고 있습니다.


PA¿ICCASAMUPPÆDA 60
60. PUPPHARATTA JÆTAKA
Long ago there was a poor man in Benarese. He had only a suite of thick clothes. He washed it to wear during the Tazaungdine festival. But his wife disliked the white clothes and craved for a garment of pink colour. All his efforts to reason with her being in vain, the man at last sneaked into the royal garden at night to steal the flower that was to be used for dyeing his wife’s garment. He fell into the hands of the guards and was ordered by the king to be impaled. He suffered terribly with the crows pecking at his eyes. Yet he murmured that his physical pain was nothing when compared to the mental suffering that overwhelmed him when he thought of the non-fulfillment of his wife’s desire and his inability to enjoy the festival together with her. So crying over ill- luck, he died and landed in hell.
Today there may be many people who do evil due to the pressure of those whom they love. All these evil deeds comprise kammas stemming from upædæna and leading to the lower worlds. So Visuddhimagga says: “Under the influence of sensual upædæna, people do evil in deeds, words and thought because of their craving for sensual objects in the present life and their desire to preserve the objects in their possession. Such evil deeds usually lead to the lower worlds.”

60. 뿝파랏따 본생경
아주 오래전 베나레스에 가난한 사내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두꺼운 옷 한 벌밖에 없었는데 카띠까(Kattika) 축제기간에 입으려고 그 옷을 세탁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흰옷을 싫어하고 분홍색 옷을 간절히 원하였습니다. 아무리 아내를 설득해도 안 되자, 사내는 결국 아내의 옷을 염색하는데 쓰는 꽃을 훔치려고 왕궁의 내원(內苑)에 몰래 들어갔습니다.
사내는 경비병에게 붙잡혔고 왕은 그를 창으로 찔러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형벌을 받을 때 까마귀들이 눈을 쪼아대는 바람에 몹시 고통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육체적인 고통도 아내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지 못하고, 아내와 함께 축제를 즐기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력 때문에 짓눌리는 정신적인 고통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중얼거렸습니다. 자신의 불운을 한탄하면서 죽어서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랑하는 사람이 압력을 행사해서 악행을 하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악행은 집착에서 비롯하며 악처에 이르는 업입니다. 그래서 「청정도론」(Vis. XVII.262)은 이렇게 설하고 있습니다.
“감각적 집착의 영향을 받아 사람들은 현생의 감각적 대상에 대한 갈애와 소유하고 있는 대상을 보존하려는 욕망 때문에 몸과 말과 생각으로 악행을 한다. 그러한 악행으로 대개 악처에 떨어진다.”


PA¿ICCASAMUPPÆDA 61
61. RIGHT AND WRONG GOOD KAMMA
Some good deeds are right but some are wrong. The so-called good deeds that some people do are harmful and as such they are evil kammas. For example, some people believe that it is a good deed to put an end to the suffering of some animals by cutting short their span of live. Every living being is afraid to die or suffer pain and it is certainly wrong to cause pain and death to animals.
Some people also consider it a good deed to bring about the speedy death of a person who is suffering from an incurable, painful disease. But the patient does not want to die although he wants to be free from pain. Even if he expresses the desire to die, it is wrong from the Buddhist point of view to cause the death of a living being and if one directly or indirectly causes the premature death of a parent by “mercy killing,” it is a grave kammic offence that leads to hell.
“Craving for the sensual pleasures of the human and deva-worlds, and misled by false teachings etc., some people do misdeeds such as killing for the attainment of their object. But as a result of their evil kamma, they land in the lower worlds after death.”
According to the commentary, misconceptions of those people arise from false teachers, lack of good kamma in the past and the failure to guard oneself. Reliance or evil teachers leads to evil kamma, much evil kamma in the previous life makes it easy to acquire evil views and evil habits and lack of self- vigilance makes one an easy prey to temptation. True religion is called saddhamma “the religion of the good man.” Those who follow the true religion hear good teachings, avoid evil deeds, evil words and evil thoughts, hold right views about the future life, kamma and its fruits, etc, cultivate good thoughts and practise dæna, søla and bhævanæ for their welfare.
The practice of alms-giving, morality and mental development is true and good dhamma because it is harmless and acceptable to every body. Nobody will blame a man who avoids killing, stealing, abusing and other misdeeds. The good deeds which we do for our welfare here and now or hereafter are wholesome kamma that stem from upædænæ in the sensual sphere. These kammas lead to rebirth in the human or deva worlds. So the Visuddhimagga says: “Those who hear the true teaching believe in kamma and the efficacy of good deeds as passport to better life in the sensual worlds of rich men, aristocrats or divine beings. So they do good deeds under the influence of kæmupædæna and are reborn in the human and deva worlds”.

61. 바른 선행과 그릇된 선행
어떤 선행은 바른 것이지만 어떤 선행은 그릇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행하는 이른바 선행이라고 하는 것은 해로운 것이기 때문에 악업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수명을 단축해 줌으로써 동물의 고통을 끝내주는 것은 좋은 행위라고 믿고 있습니다. 모든 중생은 죽거나 고통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동물에게 고통을 주고 죽게 하는 것은 확실히 잘못입니다.
어떤 사람은 고통스러운 불치병에 시달리는 사람을 빨리 죽도록 하는 것이 선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환자는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긴 하지만 죽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비록 환자가 죽고 싶다고 말하더라도, 불교의 관점에서 볼 때 중생을 죽게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만약 직접적이나 간접적으로 부모를 그렇게 안락사 시키면 그것은 지옥에 떨어지는 무거운 업의 과실입니다.
“인간계와 천신계의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와 그른 가르침으로 잘못된 길에 빠져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살생과 같은 악행을 범한다. 하지만 악업의 결과로 그들은 죽어서 악처에 떨어진다.”
주석서에 따르면 그런 사람들은 삿된 스승, 전생에 지은 선업의 부족, 그리고 자신을 보호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깁니다. 삿된 스승에 의지하면 악업을 짓고, 전생에 악업을 많이 지었으면 금생에 삿된 견해와 삿된 습관을 얻기 쉬우며 스스로 단속을 게을리 하면 유혹에 넘어가기 쉽습니다.
참된 종교는 ‘선한 사람의 종교, 즉 바른 법(saddhamma)161이라고 합니다. 참된 종교를 따르는 사람은 좋은 가르침을 듣고, 나쁜 행동과 말과 생각을 피하고, 내생, 업과 그 과보 등에 대한 바른 견해[正見]을 가지고 있으며 선한 생각을 함양하며 자신의 행복을 위해 보시, 지계, 수행을 닦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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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바른 법[正法]이라 번역하는 삿담마(saddhamma)는 ‘있는, 존재하는’이란 문자적인 뜻을 지녔다. 이 sad/sat는 주로 합성어의 앞에 놓여서 ‘바른, 참다운, 진실한’등의 의미로 쓰인다. 그래서 saddhamma는 ‘바른 법, 참된 법’을 뜻하며 주석서들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 바른 법은 교학(pariyatti), 수행(paṭipatti), 통찰(paṭivedha)의 세 가지 측면으로 나눈다. (1) 교학(pariyatti)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이 기록된 삼장(ti-piṭaka)을 공부하는 것이고, (2) 수행(paṭipatti)이란 계• 정• 혜 삼학을 닦는 것이며, (3) 통찰(paṭivedha)이란 출세간도를 통찰하고 성스러운 과를 증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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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 지계, 수행은 해롭지 않으며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참되고 선한 법입니다. 아무도 살생, 도둑질, 욕지거리나 다른 그릇된 행동을 삼가는 사람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서(here and now)의, 또는 내생의 행복을 위해서 우리가 하는 선행은 욕계의 집착에서 비롯되는 선업입니다.
이러한 선업으로 인해 인간계나 천신계에서 태어납니다. 그래서「청정도론」은 이렇게 설하고 있습니다. “참된 가르침을 듣는 사람은 업과 선행의 효험을, 욕계에 부자나 귀족이나 천신으로 태어나서 유복한 삶을 살게 되는 여권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그들은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kāmā-upādāna)의 영향 속에서 선행을 하고 인간계나 천신계에 태어난다.”


PA¿ICCASAMUPPÆDA 62
62. KAMMA AND REBIRTH
As it is said, “Bhava paccaya jæti,” rebirth occurs in the human and deva worlds or in the lower worlds because of good or evil kamma-process. So rebirth stems from kammas which result from clinging (upædæna) and craving that is rooted in the contact between the six sense-objects and the corresponding sense-organs (æyatana).
In other words, there arise viññæna, næmarþpa, salhæyatana, phassa and vedanæ in the present life as the avijjæ sa³khæra, etc in a previous existence and now on top of that, ta¼hæ and upædæna give rise to new rebirth. The situation is like that of a man who has committed a crime while he is in prison for a previous conviction, or that of a man who has incurred new debt before he has fully settled his old debt.
Such new kammas accumulate by the thousands in a single lifetime. Under certain conditions one of these kammas becomes a death-bed vision and leads to rebirth while other kammas will create rebirth at other times in the life-cycle. If there are residual kammas from the previous lives that possess great force, they take precedence over present kamma, appear as death-bed visions and create rebirth in the lower or higher worlds. The post-mortem destiny of the person in such cases is determined by the nature of kamma.

62. 업과 윤회
“존재[有]를 조건으로 태어남[生]이, bhava paccaya jāti”라는 말씀대로 선업이나 악업의 과정 때문에 인간계나 천신계, 또는 악처에서 재생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태어남[生]은 집착[取]에서 비롯되며 갈애[愛]는 여섯 감각대상[六境]과 이에 상응하는 감각기관[六根]과 맞부딪쳐서 일어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무명(無明), 상카라[行] 등이 전생에서 일어난 것처럼, 현생에서는 식(識), 정신-물질[名色], 여섯 감각장소[六入], 감각접촉[觸], 느낌[受]이 일어납니다. 게다가 갈애와 집착은 새로운 재생을 일으킵니다. 이 상황은 과거의 유죄판결로 감옥에 들어가 있는 동안 또 죄를 범하는 사람이나, 빚진 것을 다 갚기도 전에 새로운 빚을 지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러한 새로운 업은 단 한 번의 생에도 무수하게 쌓입니다. 어떤 조건하에서 이 업 중의 하나가 임종 때의 표상이 되어 재생으로 인도하는 반면에, 나머지 업은 윤회의 또 다른 때에 나타납니다. 전생에서 이어져온 큰 힘을 지닌 잔여 업이 있다면, 현생의 업보다 우선해서 임종의 표상으로 나타나, 낮은 세상이나 높은 세상에서 태어나게 합니다. 그런 경우에는 사후의 운명까지 이 업의 성질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PA¿ICCASAMUPPÆDA 63
63. FOUR KINDS OF KAMMA
Kamma is of four kinds, according to the way in which it bears fruit. (1) garu kammaweighty kamma, (2) bahula or æci¼¼aka kamma-habitual kamma, (3) æsa¼¼a kamma-death proximate kamma and (4) katattæ kamma-stored-up kamma. Garukamma is killing parents or an Arahat or causing injury to a Buddha or causing a schism in the Sa³gha. As for the good garukammas, there are the good kammas of the material and nonmaterial worlds. The garukammas head off the fruition of other kammas and leads to rebirth, rþpa and arþpa jhænas among them leading to rþpa and arþpa rebirth.
The evil garukammas lead direct to hell after death; hence the term pañcænantriyakammasthe five great evil-kammas leading invariably to hell. The man who kills his father or mother unknowingly or knowingly can never attain jhæna or the path and fruition (magga-phala) in the present life; he is bound to land in hell after his death. He cannot attain jhæna or the path nor can any good kamma save him from hell. This is evident in the story of Ajætasattu.

63. 네 가지 업의 종류
업은 과보를 가져오는 방식에 따라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1) 무거운 업(garuka-kamma)
(2) 습관적인 업(bahula-kamma, āciṇṇaka-kamma)
(3) 임종에 다다라 지은 업(āsaṇṇa-kamma)
(4) 이미 지은 업(kaṭattā-kamma)
무거운 업(garuka-kamma)은 ① 어머니를 죽이는 것 ② 아버지를 죽이는 것 ③ 아라한을 죽이는 것 ④ 부처님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 ⑤ 승가를 분열시키는 것입니다. 선한 무거운 업에는 색계와 무색계의 선업이 있습니다. 무거운 업은 다른 업이 과보를 맺는 것을 가로 막고 재생하게 하며, 그 가운데 색계와 무색계선은 색계와 무색계에서 재생하게 합니다.
악한 무거운 업을 지으면 죽어서 곧장 지옥에 떨어집니다. 그래서 반드시 지옥에 떨어지는 다섯 가지 무거운 악업이란 뜻으로 오무간업(五無間業 pañcānantariya-kamma)이라고 합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알고 죽이거나 모르고 죽이는 사람은 현생에서 절대로 선정이나 도과를 얻지 못하고 죽어서 곧장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선정이나 도과를 얻지 못할 뿐 아니라 어떠한 선업도 그를 지옥에서 구제할 수 없습니다. 이는 다음의 아자따삿뚜(Ajātasattu) 이야기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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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STORY OF AJÆTASATTU
Ajætasattu was the son of Bimbisæra, the king of Magadha state, a devoted follower of the Buddha. Prior to the birth of the prince, the queen had the desire to drink the blood from the right arm of the king. When the king learnt this, he had the blood taken out and fulfilled her desire. The soothsayers then predicted that the child in the queen’s womb would become the king’s enemy.
Hence the name Ajætasattu-the potential enemy of the father while still in the mother’s womb. The queen tried to abort the child but as the king’s kamma and the child’s kamma would have it otherwise, she did not succeed in her attempt. The king had her pregnancy well protected and the child was born. When he came of age, he was appointed heir-apparent.
Then the young prince fell into the clutches of the evil-minded Devadatta who misused his psychic power for his selfish ends. Turning himself into a boy with a snake coiled around his waist, he appeared before Ajætasattu and then showed himself as a bhikkhu. The prince was deeply impressed and no wonder for people are very much interested in miracles and they have blind faith in anyone who can perform them. The prince held Devadatta in high esteem and became his devoted follower. Then Devadatta made another move for the success of his evil design. He told the prince that since people did not live long, he (the prince) should kill his father and become king while still in the prime of his life; and that he (Devadatta) on his part would kill the Buddha. The prince failed in his attempt on the life of the king but when the latter learnt of his desire, he handed over his kingship to his son.
The transfer of power nonetheless came short of Devadatta’s scheme. On his advice, Ajætasattu imprisoned his father and starved him. The queen was the only person who was permitted to visit the prison and see the king. She secretly brought food for the king by various means and at last she was forbidden to visit the prison. From that day the king got nothing to eat but still he managed to keep himself in good physical condition by pacing on the floor. Then by the king’s order, the barbers caused such injury to the feet of his father as to make it impossible for him to walk. According to the commentary, he was thus injured because in a previous life he walked with footwear on the platform of a pagoda and trod with unwashed feet on a mat meant for the bhikkhus.
King Bimbisæra died probably at the age of 67. His son Ajætasattu was not evil-minded at heart. His good nature was evident in his devotion to the Buddha after he had wronged his father, his adoration and enshrinement of the Buddha relics and whole-hearted support which he gave to the First Council. It was his association with the evil teacher that led him astray to the point of parricide.
His life affords us a lesson that we should specially bear in mind. On the very day of his father’s death his wife gave birth to a son. On hearing the news, he became excited and overwhelmed with great affection for his child. This reminded him of his father and he ordered the release of the imprisoned king. But it was too late. When later on he learnt from his mother how much he was loved and cared for by his father in his childhood, he was seized with remorse. His life became wretched and miserable. He could not sleep at night, haunted by the visions of hell and smitten by conscience for his crime against his father and devout lay disciple of the Buddha at that.
So led by the physician Jøvaka, he went to see the Buddha. At that time the Lord was surrounded by over a thousand bhikkhus. But as they were in a contemplative mood, all was quiet with none speaking or making any movement of their hands or feet. Being deeply impressed, the king said, “May my son Udaya-baddha be blessed with the kind of serenity which these bhikkhus possess!” Perhaps he feared lest his son should come to know how he seized power and try to follow in his father’s footsteps But later his fear did become a reality for down to his great grandson, the sons ascended the throne after killing their fathers. King Ajætasattu asked the Buddha about the immediate benefits of the life in the holy order.
The Lord enlarged on the benefits accruing from the holy life the lay follower’s reverence for the bhikkhu, moral purity, the first jhæna and other higher states of consciousness in the mundane sphere, psychic powers, extinction of defilements and the attainments of the holy path. After hearing the sermon, Ajætasattu formally declared himself a disciple of the Buddha. He would have attained the first stage on the path but for his parricide. Nevertheless, from that time he had peace of mind and after his death he was spared the terrors of Avøci hell that would have been in store for him had he not met the Buddha.

64. 아자따삿뚜 이야기
아자따삿뚜는 부처님의 헌신적인 제자인 마다가국의 빔비사라(Bimbisāra) 왕162의 아들 이었습니다. 태자를 낳기 전에 왕비는 왕의 오른 팔의 피를 마시고 싶은 욕망을 느꼈습니다. 이를 알게 된 왕은 피를 뽑아내서 왕비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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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빔비사라(Bimbisāra) 왕은 15세에 왕위에 올라서 52년간을 왕위에 있었고, 부처님보다 5살이 위였다고 한다. 주석서(SnA.ii.386)에 따르면 빔비사라 왕은 세존께서 깨달음을 얻으면 제일 먼저 라자가하를 방문해 주시기를 청하였고 세존께서는 실제로 그렇게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세존께서 머물도록 지은 최초의 절이 죽림정사(竹林精舍)라고 알려진 웰루와나(Veḷuvana)이다. 이렇게 빔비사라 왕은 세존이 깨달음을 증득하신 때부터 아들 아자따삿뚜(Ajātasattu)에게 시해될 때까지 37년간을 부처님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불교가 인도 중원에 정착하는데 큰 기여를 한 왕이다. 하지만 부처님을 해코지하려는 데와닷따(Devadatta)에게는 이러한 빔비사라 왕은 걸림돌이었기 때문에, 데와닷따는 아자따삿뚜를 사주하여 왕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도록 사주했다. 그러나 이러한 음모는 사전에 발각되었고 대신들은 아자따삿뚜와 데와닷따 무리를 처단할 것을 빔비사라에게 권했다. 왕은 사람을 보내어 아자따삿뚜가 왕위를 탐내고 있음을 듣고는 순순히 왕위를 물려주었다. 하지만 데와닷따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아지따삿뚜에게 빔비사라 왕을 죽여야 한다고 계속 종용하였다. 하지만 무기로는 왕을 해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자 아자따삿뚜는 그를 굶겨 죽일 작정으로 뜨거운 감방에 가두어 두고 왕비(아자따삿뚜의 모친)외에는 아무도 방문할 수 없게 했다. 왕비가 갖가지 방법으로 음식물을 반입하자 마지막에는 그녀마저 왕을 방문하지 못하도록 했다. 하지만 왕은 방안에서 경행을 함으로써 그럭저럭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아자따삿뚜는 이발사를 보내서 왕의 발바닥에 상처를 내고 거기에 소금과 식초를 뿌렸다.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된 빔비사라는 죽어서 사대왕천(Cātummahārājika)에서 비사문천(毘沙門天 Vessavaṇa)을 모시는 자나와사바(Janavasabha)라는 야차(yakkha)로 태어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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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예언가들이 왕비의 뱃속에 있는 아이는 왕의 적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리하여 모태에 있을 때 이미 아버지의 잠재적인 적이라는 뜻인 ‘아자따삿뚜(Ajātasattu)’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왕비는 아이를 지우려고 애썼지만 왕의 업과 아이의 업의 방해로 낙태에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왕은 임신 중인 왕비를 잘 보호하여 아이가 태어났고 나이가 찼을 때 황태자로 책봉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젊은 태자는 자신의 신통력을 이기적인 목적에 악용하는 사악한 데와닷따의 마수에 걸려들었습니다. 뱀을 허리에 칭칭 감은 소년의 모습으로 변하여 아자따삿뚜 앞에 나타나서는 다시 비구의 모습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태자는 깊은 감명을 받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사람들은 기적에 매우 관심이 많고 그러한 기적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을 맹신하기 때문에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태자는 데와닷따를 깊이 존경하게 되었고 헌신적인 추종자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데와닷따는 자신의 악한 의도를 이루기 위해 또 다른 계획을 꾸몄습니다. 태자에게 사람은 오래 살지 못하니까 가장 혈기 왕성할 때인 지금 부왕을 죽이고 자신은 부처님을 죽이겠다고 말했습니다. 태자는 왕을 죽이는데 실패했지만 나중에 태자의 욕망을 알게 된 빔비사라 왕은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의 이동은 데와닷따의 음모에는 못 미치는 것이었습니다. 데와닷따의 사주를 받아 아자따삿뚜는 부왕을 감옥에 가두고 굶겼습니다. 왕비만이 감옥에 가서 왕을 만날 수 있게 허용된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왕비는 여러 가지 방법을 써서 왕에게 몰래 음식을 가져다 주었지만 마침내 왕비마저 감옥에 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 날부터 왕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지만 그래도 마루위에서 경행을 함으로써 그럭저럭 건강을 유지하였습니다. 그러자 왕의 명령을 받은 이발사가 걷지 못하도록 빔비사라 왕의 발에 상처를 내었습니다. 주석서에 따르면 빔비사라 왕이 그렇게 발을 다치게 된 것은 전생에 신발을 신고 탑묘의 앞마당을 걸었고, 씻지 않은 발로 비구들을 위한 방석을 밟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빔비사라 왕은 대략 67세쯤 되었을 때 죽었습니다. 그의 아들 아자따삿뚜의 본마음은 사악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선한 성품은 아버지에게 나쁜 짓을 한 뒤에 부처님께 헌신했던 점, 부처님의 사리를 숭배하고 소중히 안치하였던 점, 그리고 제1차 결집163때 열성을 다해 지원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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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 1차 결집은 불멸직후 7일째 되던 날 수밧다(Subhadda)라는 늦깎이 비구가 이제 부처님이 입멸하였으므로 더 이상 성가실 게 없어졌으니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충격적인 말을 들은 마하깟사빠 장로가 이대로 놔두면 교법(sāsana)은 사라지고 말 것이라고 우려하여 개최하게 된 것이다. 마하깟사빠는 아자따삿뚜 왕의 후원 하에 라자가하(Rājagaha)의 칠엽굴(七葉窟)에서 500명의 아라한 비구들을 모아 부처님의 모든 교설을 결집하였다. 아난다는 결집이 개최되기 전날까지도 아라한과를 얻지 못해 결집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다가 결집이 개최되기 바로 전날 아라한이 되어 결집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기록은 1차 결집에서 부처님의 법을 모아 엮는데 매우 신중하게 하였음을 나타내어 주는 것이다. 여기서 결집이라 번역한 상기띠(saṇgīti)는 원래 합송(合誦)이라는 뜻이다. 이때 경은 부처님을 항상 가까이 모시던 아난다(Ānanda) 존자가 송출하고 율은 계율에 대한 이해가 깊었던 우빨리(Upāli) 존자가 송출했다. 그리고 마하깟사빠는 이들에게 질문하는 역할을 하였다. 1차 결집에서는 적어도 율장의 경분별 부분과 경장의 4부 니까야는 확정이 되었을 것이고 논장은 성립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대부분의 학자들의 의견이다. 아쇼까 대왕 재위시절에 결행된 3차 결집에서는 지금 현존하는 형태의 삼장이 완성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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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자따삿뚜가 아버지를 죽이는 죄업을 지을 정도로 잘못된 길에 빠진 것은 바로 사악한 스승과 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자따삿뚜의 삶은 우리가 특별히 명심해야 할 교훈을 줍니다.
빔비사라 왕이 죽던 바로 그날, 아지따삿뚜의 왕비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아지따삿뚜는 흥분하고 아이에 대한 엄청난 애정에 휩싸였습니다. 그러자 자기 아버지 생각이 나서 감옥에 갇힌 왕을 풀어주라고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너무 늦었습니다.
나중에 어머니로부터 부왕이 어린 시절의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보살펴 줬는지를 들은 뒤 죄책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때부터 아지따삿뚜의 인생은 비참하고 불행해졌습니다. 그는 밤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고, 지옥의 환영과 부처님의 헌신적인 재가신도였던 아버지에게 지은 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에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의사 지와까(Jīvaka)164의 인도로 아자따삿뚜는 부처님을 뵈러 갔습니다. 그때 세존께서는 천여 명의 비구들에게 둘러싸여 계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명상에 잠겨 있었기 때문에 누구도 말소리를 내거나 손이나 발을 움직이지 않고 모두 조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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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 지와까 꼬마라밧짜(Jīvaka Komārabhacca)는 부처님의 주치의(主治醫)로 잘 알려진 명의(名醫)였다. 그는 라자가하(Rājagaha)의 기녀(妓女)였던 살라와띠(Sāla-vati)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나자마자 광주리에 담아 쓰레기 더미 위에 버려졌다고 한다. 빔비사라(Bimbisāra) 왕의 아들이며 아자따삿뚜와 이복형제인 아바야(Abhaya)왕자가 이를 발견하고 사람들에게 살아 있는가를 묻자, ‘그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jīvita)'라고 대답하여서 그의 이름이 지와까가 되었으며, 왕자(kumāra)에 의해서 양육되었다고 해서 꼬마라밧짜(Komārabhacca)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AA.i.216) 그는 자라서 자신의 출신에 대해서 알게 되자 아바야 왕자 몰래 딱까실라(Takkasilā)로 가서 칠 년 동안 의술을 배웠다고 한다. 공부를 마치고 라자가하로 돌아와서는 빔비사라 왕의 고질병을 치료하여 유명해졌다고 한다. 그래서 왕과 궁중의 주치의로 임명되었고 부처님과 승가의 주치의 역할도 하였다. 아버지 빔비사라 왕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아자따삿뚜도 지와까를 주치의로 삼아서 가까이에 두었다. 지와까가 부처님을 치료한 일화는 율장과 주석서등에 나타나고 있다. 지와까는 예류과를 증득한 뒤 항상 하루에 두 번씩 세존께 인사드리러 갔으며 세존께서 머무시는 왕사성의 죽림정사(Veḷuvana)가 너무 멀어서 그가 소유하고 있던 망고 숲을 승가에 기증하여 부처님과 승가가 머물게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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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감명을 받은 왕은 “내 아들 우다야밧다(Udayabaddha)가 이 비구들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고요함으로 축복받기를!”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마도 아자따삿뚜는 자기 아들이 자신이 어떻게 권력을 쥐었는지를 알게 되면 자신의 전철을 밟을까봐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두려움은 증손자까지 현실로 이어져서 아들들은 아버지들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습니다.
아지따삿뚜왕은 부처님께 거룩한 출가생활로 얻어지는 즉각적인 결실[沙門果]에 대해 여쭈었습니다. 세존께서는 재가자들의 비구에게 표하는 존경, 청정한 계행, 세간계의 초선과 다른 높은 상태의 마음, 신통, 번뇌의 소멸과 성스러운 도의 증득이 거룩한 삶[梵行]을 살아서 얻어지는 이익이라고 상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난 아자따삿뚜는 부처님의 제자임을 공식으로 선언하였습니다. 아버지를 죽이지만 않았더라면 아자따삿뚜는 도의 첫째 단계인 예류과를 얻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부터 아자따삿뚜는 마음의 평화를 얻었고, 부처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죽은 다음에 떨어졌을 무간지옥의 두려움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PA¿ICCASAMUPPÆDA 65
65. HABITUAL AND DEATH-BED KAMMAS
The other three weighty kammas, viz., killing an Arahat, causing injury to the Buddha and wilfully causing a schism in the Sa³gha are also bound to drag the offender to hell. The other type of kamma that bears fruit is habitual kamma, called bahula or acinna kamma.
Failure to lead a good moral life may be become habitual if no step is taken to remove it, and it will have evil kammic effect in a future life. So laymen should live up to the five precepts and in case of any breach verbally affirm the will to guard one’s moral life more vigilantly. Moral purity is equally vital to the life of a bhikkhu. Failure to make amends for any deliberate or unitentional violation of a vinaya rule will create habitual kamma and so the bhikkhu should seek to regain moral purity through confession and reaffirmation of his will to preserve it.
Alms-giving, reverence for parents and teachers, contemplation of the Buddha, pratice of meditation and so forth which one does daily are also habitual kammas that tend to bear immediate fruits. In the absence of habitual kamma what we do at the last moment of our life (asanna kamma: death-bed kamma) produces kammic results. In one Abhidhammæ book it is described as being more potent than habitual kamma but perhaps this is true only in exceptional cases. As the commentaries say, the habitual kammas probably take precedence and bear fruits.
Nevertheless, in the light of stories in ancient Buddhist literature we can certainly rely on death-bed kamma. A dying man who had killed people for over 50 years attained the deva world after offering food to Særiputta and hearing his discourse. This story finds an echo in the experience of a Sinhalese fisherman who landed in the deva world after his encounter with a thera just before his death.
As productive as the positive death-bed kamma is its negative counterpart. A Sinhalese layman who practised meditation for many years was disappointed as he had never seen even the light. He then concluded that the Buddha’s teaching was not the way to liberation and because of this false view he landed in the peta world after his death.
Failure to encounter the light, etc in the practice of meditation may be due to wrong method, wrong effort or lack of basic potential (paramø). In the time of the Buddha, a monk called Sunakkhatta attained divine-eye but not the divine-ear because he did not have the potential for it and besides there was his bad kamma as a hindrance.
So the yogø need not be disheartened if his practice does not produce the desired effect. By and large practice along the right path leads to unusual experiences. With tranquillity and purity of mind the material object of contemplation and the contemplating consciousness become clearly distinct as do their causal relation and their ceaseless, rapid arising and dissolution. At that time the yogø sees the light but even if he does not see it clearly he experiences joy, ecstasy, etc for joy, ecstasy, transquillity, equanimity, etc for joy, ecstasy, tranquillity, equanimity, etc form the links of enlightenment (bojjhanga) that are so vital to the development of vipassanæ insight. Reflection on næmarþpa by itself does not lead to these higher states of consciousness. In the absence of habitual or death-bed kamma, there is kattatæ kamma which means the kamma that one has done once in a lifetime.

65. 습관적인 업과 임종할 무렵에 지은 업
아라한을 죽이고, 부처님에게 상처를 입히고, 의도적으로 승가를 분열시키는 다른 세 가지 무거운 업도 이 악업을 지은 자를 지옥에 떨어뜨립니다. 과보를 맺는 다른 업은 습관적인 업(bahula-kamma, āciṇṇaka-kamma)입니다. 선한 계행을 지키지도 못하고 나쁜 습관을 없애려는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다면, 습관적인 업이 되어 내생에 나쁜 과보를 받습니다.
그래서 재가자는 반드시 오계를 지키며 살아야 하고 계를 어겼을 경우는 더욱 더 경계하여 자신의 계행을 수지하겠다고 구두로 다짐해야 합니다. 계청정은 매우 중요합니다. 율장의 계목(戒目)을 일부러, 혹은 모르고 어겼을 경우에 그것을 바로 잡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습관적인 업이 되기 때문에, 비구는 반드시 참회와 계목을 수지하겠다는 재확약을 통해서 계청정을 회복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날마다 행하는 보시, 부모와 스승에 대한 공경, 부처님을 계속해서 생각함165[佛隨念], 명상수행 등은 즉각적인 과보를 가져오는 습관적인 업입니다. 습관적인 업이 없을 때에는 임종에 다다라 지은 업(āsaṇṇa-kamma)이 업의 과보를 가져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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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 계속해서 생각함이라 번역한 anussati는 중국에서는 수념(隨念)이라고 번역되었고 서양에서는 recollection, contemplation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청정도론」(Vis.VⅢ)에서는 다음과 같은 열 가지 계속해서 생각함[十隨念]으로 정리되어 있다.
① 부처님을 계속해서 생각함(佛隨念 buddhānussati) ② 법을 계속해서 생각함(法隨念 dhammānussati) ③ 승가를 계속해서 생각함(僧隨念 sanghānussati) ④ 계를 계속해서 생각함(戒隨念 sīlānussati) ⑤ 보시를 계속해서 생각함(cāgānussati) ⑥ 천신을 계속해서 생각함(天隨念 devatānussati) ⑦ 죽음을 계속해서 생각함(死隨念 maraṇasati) ⑧ 몸에 대한 알아차림(身隨念 kāyagatā-sati) ⑨ 들숨날숨에 대한 알아차림(出入息念 ānāpānasati) ⑩ 고요함을 계속해서 생각함(寂靜念 upasamānussati)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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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담마의 한 논서는 이 임종에 다다라 지은 업이 습관적인 업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고 설하고 있지만 어쩌면 이는 예외적인 경우에만 해당될 것입니다. 주석서에 나와 있듯이, 아마도 습관적인 업이 우선하고 과보를 맺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 불전(佛典)에 있는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우리는 임종에 다다라 지은 업에 확실히 의지할 수 있습니다. 50여 년 동안 사형집행인으로 사람들을 죽였던 어떤 사람은 사리뿟따(Sāriputta) 존자166에게 음식을 보시하고 법문을 들은 다음 천신계에 태어났습니다. 이 이야기는 죽기 직전에 한 장로 스님과 만나고 나서 천신계에 태어난 한 스리랑카 어부의 체험에서 공감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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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사리뿟따(Sāriputta) 존자는 날란다 지방의 큰 바라문 가문에 태어났으며 출가전 이름은 우빠띳사(Upatissa)라고도 불리었다. 사리뿟따라는 이름은 존자의 어머니 이름이 사리(Sārī)였기 때문에 사리의 아들이란 뜻인 사리뿟따로 불리게 되었다. 목갈라나(Moggalāna) 존자와는 어렸을 적부터 친한 친구였으며 어느 날 라자가하(Rājagaha)의 산마루 축제[山頂祭]를 보러 갔다가 갑자기 삶의 덧없음을 느끼고는 함께 출가하여 사문이 되었다.
처음 출가해서는 불가지론(不可知論)을 펴던 산자야 벨랏티뿟따(Sañjaya Belaṭṭhiputta)의 제자였는데 다섯 비구가운데 한 분이었던 앗사지(Assaji) 존자가 읊는 게송의 첫 번째 두 구절을 듣고 예류과를 얻었다. 그리고는 그 게송을 도반인 목갈라나에게 전해주어 그도 예류과를 얻게 하고는 함께 승가에 들어와 부처님의 상수제자가 되었다. 부처님께서는 사리뿟따 존자와 목갈라나 존자를 비구들이 본받아야 할 이상적인 제자라고 선언하셨다.(S.ii.235; A.i.88). 부처님은 「제분별경(諸分別經 Saccavibhanga Sutta)」(M.iii.248)에서 두 상수제자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설명하셨다. “사리뿟따는 아이를 낳는 어머니와 같고 목갈라나는 갓난아이를 돌보는 유모와 같다. 사리뿟따는 제자들을 가르쳐 예류과에 들게 하고 목갈라나는 더 높은 단계로 이끌어 올려준다.” 세존께서는 두 상수제자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로 하여금 승가의 일을 분담하여 보살피도록 하시고, 여래가 안 계실 때에는 그들이 승가의 일을 책임지도록 하셨다. 또한 부처님은 긴요한 상황이 생기면 특별한 임무를 두 상수제자에게 부여하시는 일이 자주 있었다. 예컨대 데와닷따(Devadatta)가 웨살리(Vesāli)출신의 갓 출가한 비구들을 꼬드겨서 상두산(象頭山)으로 데리고 가자, 부처님께서는 두 상수제자를 보내어 데와닷따가 잠시 잠들어 있는 틈을 타 500명의 비구들을 설득하여 모두 되돌아오게 하셨다. (Vin.2:199-200)
주석서에 따르면 사리뿟따 존자가 마지막 생에 고따마 부처님의 상수제자가 된 것은 1아승지 10만겁 전 아노마닷시(Anomadassī) 부처님때 사라다(Sarada)라는 바라문이었을 때 목갈라나 존자의 전신인 시리왓다나(Sirivaddhana)와 함께 미래 부처님의 상수제자가 되고자 원을 세웠기 때문이라고 한다.「본생경」을 보면 사리뿟따는 보살과 함께 생사윤회를 반복하면서 위기에 처한 보살을 여러 번 구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보살이 바라밀을 완성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밀린다왕문경」에 따르면 사리뿟따 존자는 수천 수만 생 동안 보살의 아버지, 할아버지, 삼촌, 형, 아들, 조카, 그리고 친구였다고 한다.
부처님은 종종 법의 주제만 제시하고, 그러면 사리뿟따 존자는 그 주제에 대해 상세하게 설법을 하였고 그러한 법문은 부처님의 최종 승인을 얻었다고 한다.(M.i.13; iii.46, 55, 249). 그래서 법의 사령관(法將 Dhammasenāpati)라고 불렸다. 상수제자로서 사리뿟따가 한 주요한 임무는 불법을 체계화하는 일이었고 이것이 아비담마의 시작이었다. 부처님께서는 삼십삼천에 임하여 마야부인을 위시한 천신들에게 아비담마를 설하셨다. 그때 부처님은 제석(Sakka)의 보좌에 여래의 표상으로 만들어 놓고 그로 하여금 계속 법문을 하게하고 히말라야의 아노아따(Anoatta) 호수로 매일 내려 오셔서 목욕을 하시고 쉬시곤 했다. 이때 사리뿟따가 와서 부처님에게 아비담마를 듣고서 다시 이를 오백 명의 제자들에게 전수하였다고 한다. 사리뿟따의 뛰어난 지혜는 부처님께서 삼십삼천에서 상까사(Saṅkasa)로 내려온 뒤에 회중들에게 각각의 지적 수준에 맞는 질문을 하셨는데 마지막 최상의 질문은 아무도 답변하지 못하고 오직 사리뿟따만이 답변을 할 수 있었던 데에서 잘 드러난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사리뿟따를 큰 지혜를 가진 이들 가운데 으뜸이라고 선언하셨고(A.i.23), 지혜에 있어서 여래 바로 다음이라고 칭찬하셨다.(SA.ii.45)
법의 스승으로서 누렸던 사리뿟따의 위대한 명성은 사후에도 존속되어 후대의 불자들 사이에서 하나의 귀감이 되고 있다.「밀린다왕문경」에서 밀린다 왕은 나가세나 존자를 사리뿟따 존자와 비교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 부처님 문하에서 법의 사령관 사리뿟따 존자를 제외하고는 존자만큼 질문에 잘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소."(Miln.420)
사리뿟따는 제자를 가르칠 때에도 한량없는 인내심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는 제자들이 예류과를 성취할 때까지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일깨우고 가르치곤 했다. 그런 다음에라야 그는 새 제자를 받아들였다. 그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라 아라한과를 성취한 이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사리뿟따 존자는 지혜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한량없는 자비심을 가졌다. 또한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 데도 으뜸이었다.「로사까 본생경(Losaka Jātaka)」(J.41)에 따르면 어느 날 사왓티(Sāvatthi) 시내를 탁발하다가 남의 집 하수도에서 밥알을 주워 먹는 로사까 띳사(Losaka-tissa)를 보고 매우 불쌍히 여겨서 그를 승원에 데리고 와 손수 목욕을 시키고 출가시켰다.「까란디야 본생경(Kāraṇḍiya Jātaka)」(J.356)에 따르면 사리뿟따는 대상을 가리지 않고 어부와 사냥꾼처럼 생계 때문에 도저히 오계를 지킬 수 없는 사람들에게까지도 오계를 주어서 바른 도로 인도하려고 노력했다.
존자는 또한 설법에 있어서도 누구보다 으뜸이었다. 임종의 병상에 누워 있던 아나따삔디까(Anātha-piṇḍika)에게 심오한 설법을 하였고, 존자의 설법에 감동한 아나타삔디까는 눈물을 흘리며 이에 견줄만한 법문은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노라고 고백했다.(M143).
사리뿟따 존자는 또한 한번 결의한 것은 두 번 다시 행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때 신자들이 비구들을 위해 과자를 가져왔는데 같이 있던 젊은 비구가 탁발을 나가 자리에 없었으므로 신자들은 그 비구를 위해 남겨놓은 여분의 과자마저 존자에게 마저 드시게 하였다. 그때 젊은 비구가 돌아와 자신 몫의 과자가 없어진 것을 알고는 불평을 하였다. 사리뿟따 존자는 무안하여 두 번 다시는 그 과자를 입에 대지 않겠다고 선언하였고 그 이후로는 평생 과자를 들지 않았다고 한다.(J.69)
사리뿟따 존자는 감사하는 마음과 친절, 남을 돕는 마음과 참을성 같은 훌륭한 성품 덕분에 출가자로서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깊은 교우관계를 많이 맺을 수 있었다. 그 중에 또 다른 한분의 상수제자인 목갈라나와는 어렸을 때부터 친구이자 도반으로 아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그 친분은 부처님의 말년 죽음이 그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한편 사리뿟따 존자의 어머니는 삼보에 대해서 내내 증오심을 품어왔던 고집 센 바라문이었다. 입멸할 때가 왔음을 안 존자는 부처님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는 고향마을 날라까(Nālaka)로 돌아와서 자신의 어머니에게 설법을 하여 예류과를 얻게 하고는 태어난 방에서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 보름 뒤 목갈라나도 입적하였으며, 그로부터 반년 후에 부처님께서 무여의열반에 드셨다고 한다.
19세기 중엽 영국의 커닝햄(Cunningham)에 의해 인도의 산치(Sanchi) 대탑에서 사리뿟따와 목갈라나의 사리가 들어있는 두 개의 석재 사리함이 발굴되었고 두 존자의 사리중 일부가 1950년 10월 20일 미얀마에 전해져 제6차 결집의 사적지에 세워진 양곤의 까바예(Kabaye) 파고다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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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에 다다라 지은 업의 긍정적인 면이 생산적인 것처럼 그 반대인 부정적인 면도 또한 생산적입니다. 스리랑카의 한 재가자는 여러 해 동안 명상을 닦았지만 빛조차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실망했습니다. 그래서 그 재가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해탈에 이르는 길이 아니라고 단정하였고 이러한 삿된 견해로 말미암아 죽어서 아귀계에 떨어졌습니다.

명상 수행에서 빛 등을 보지 못하는 것은 그릇된 방법이나 그릇된 노력으로 명상을 했거나 기본 바라밀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수낙캇따167라는 비구는 하늘 눈[天眼]을 얻었으나 하늘 귀[天眼]는 얻지 못했는데 이는 하늘 귀[天耳]를 얻을 수 있는 바라밀이 없던 데다 그의 악업이 장애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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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 주석서(DA.i.312-313)에 따르면 수낙캇따는 천상의 모습을 보고자 해서 세존께 그 방법을 여쭈었다. 세존께서는 그 방법을 가르쳐 주셨으며 그는 그대로 삼매를 닦아서 신통을 얻어 신들의 모습은 볼 수 있었다. 그런 다음에 천상의 소리를 듣고자 하여 세존께서 알려주신 대로 하였지만 전생에 계를 지닌 비구의 귀를 때려 귀머거리를 만들었기 때문에 천상의 소리는 듣지 못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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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수행자는 수행을 해도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고 낙담할 필요가 없습니다. 보통 바른 도를 따라서 수행을 하면 특이한 체험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음이 고요해지고 청정해지면 정신-물질의 인과관계 및 그들의 끊임없이,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짐이 확연히 보이는 것처럼, 관찰의 대상인 물질과 관찰하고 있는 마음도 확연히 구별합니다.

이 단계에서 수행자는 빛을 보게 되지만 설령 빛을 분명하게 보지 못하더라도, 위빠사나 지혜의 계발에 아주 중요한 행복, 희열, 경안, 평온 등과 같은 깨달음의 구성요소[七覺支]168를 경험합니다. 정신-물질을 그냥 숙고만해서는 그러한 높은 마음상태에 이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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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깨달음의 구성요소로 옮긴 봇장가(bojjhaṅga)는 bodhi(覺, 깨달음) +aṅga(分, 요소, 인자)의 합성어이다. 그래서 깨달음으로 이끄는 요인, 또는 통찰지를 이끌어 내는 인자를 의미한다. 중국에서는 칠각지(七覺支)로 옮겼고 영어로는 seven factors of enlightment라고 한다. 이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는 다음과 같다.
(1) 염각지(念覺支 sati-sambojjhaṅga) - 알아차림의 깨달음의 각지
(2) 택법각지(擇法覺支 dhammavicaya-sambojjhaṅga) - 법을 검토하는 깨달음의 각지
(3) 정진각지(精進覺支 viriya-sambojjhaṅga) - 정진의 깨달음의 각지
(4) 희각지(喜覺支 pīti-sambojjhaṅga) - 희열의 깨달음의 각지
(5) 경안각지(輕安覺支 passaddhi-sambojjhaṅga) - 편안함의 깨달음의 각지
(6) 정각지(定覺支 samādhi-sambojjhaṅga) - 삼매의 깨달음의 각지
(7) 사각지(捨覺支 upekkhā-sambojjhaṅga) - 평온의 깨달음의 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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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적인 업이나 임종에 다다라 지은 업이 없는 경우에는 생애에 한번만 지은 업을 뜻하는 이미 지은 업(kaṭatta-kamma)169이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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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 무거운 업, 임종에 다다라 지은 업, 습관적인 업의 세 가지 업이 없으면 이미 지은 업이 재생연결시에 그 기능을 발휘한다.「청정도론」(Vis.XIX.15)에는 업의 성숙하는 순서에 따른 설명이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다.
“다른 네 가지 업이 있다. 무거운 업, 습관적인 업, 임종에 다다라 지은 업, 이미 지은 업이다. 유익한 것이든 해로운 것이든 무겁거나 가벼운 업 중에서 어머니를 살해한 업이나 혹은 고귀한 경지(즉 선의 증득)의 업이 무거운 업이고, 이것이 먼저 과보를 준다. 그와 마찬가지로 습관적인 것과 습관적이지 않은 것 중에서 좋은 행위이든 나쁜 행위이든 습관적인 것이 먼저 과보를 준다. 임종에 다다라 지은 업이란 임종 시에 기억나는 업이다. 임종에 가까운 사람이 그 업을 기억할 수 있다. 그것에 따라 태어난다. 이 셋에 포함되어 있지 않고 자주 반복하여 지었기 때문에 이미 지은 업이라 한다. 앞의 세 가지 업이 없을 때 이것이 재생연결을 일으킨다.”(Vis.XIX.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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