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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글 제목: (Mahāsi Sayādaw)75~85
전체글올린 게시글: 2015-12-30, (수) 4:13 am 

가입일: 2015-01-30, (금) 10:13 pm
전체글: 103
PA¿ICCASAMUPPÆDA 75
75. STORY OF UGGÆ
The anægami Ariyas do good presumably because of their desire for the bliss in material and immaterial spheres and arahatship. It is of course arahatship that can help remove sensual craving. The desire for arahatship as the motivation for doing good in the case of anægæmi-yogø is evident in the story of Uggæ.
Uggæ was a householder in Vesæli city. The Buddha spoke of the eight wonderful attributes possessed by Uggæ. In response to the inquiry by a monk about the lord’s reference to his attributes, Uggæ said that he knew nothing about it but that he had eight distinctive qualities which were as follows.
1. When he saw the Buddha for the first time, he concluded decisively that Gotama was the real, all-Enlightened Buddha.
2. He attained anægami insight into the four noble truths when he heard the Buddha’s discourse. He observed the five precepts that included abstinence from sexual intercourse.
3. He had four young wives. He told them about his sexual abstinence and permitted them to return to their parent’s homes or to marry the men of their own choice. At the request of his eldest wife, he willingly performed the wedding ceremo ny before giving her away to the man she loved.
4. He had resolved to spend all his wealth on giving alms to holy men of high moral character.
5. He approached the bhikkhus respectfully.
6. He heard the bhikkhu’s sermon respectfully. He preached if the bhikkhu did not give a sermon.
7. The devas came to him and said, “The doctrine of the Buddha is very good,” He replied that the Dhamma was a good doctrine whether or not they said so about it. He did not feel conceited for his dialogue with the devas.
8. He found himself free from the first five attachments that led to the lower, sensual worlds. One day Uggæ, the householder who possessed these eight qualities and had attained the anagami stage on the path offered food and robes which he liked very much to the Buddha. The Lord commented on the nature of alms-giving as follows.

“One who offers anything that pleases him or that he prizes highly gets something which he adores. One who offers to the Ariyan noble who is of high moral character is doing an act of dæna that it is hard for ordinary people to do and therefore he gets what he wants very much.”
Some years later Uggæ died and passed on the Suddhævæsa brahma-world. Before long he came and paid respect to the Buddha. He said that he had attained. Arahatship that was indeed the object of his aspiration when he offered his much beloved food to the Lord in his previous existence.
The Buddha again commented on the nature of kammic benefits of alms-giving _ how the giver got what he prized most if he offered his much-prized object, how he attained a rare object if he offered rare things, how he attained to a much extolled stage if he offered much-extolled objects.
The moral of this story is that one may even attain Arahatship, the summum bonum of the holy life as the kammic result of giving away one’s much prized and precious objects. Ugga’s alms giving was motivated by the desire for Arahatship and it is this desire, or kæmupædæna that formed his driving force. Some people may object to making the term kæmupædæna synonymous with the desire for Arahatship, and labels it rather kusalachanda (wholesome desire) but then they will have to explain what kind of upædæna it is that gives rise to good acts of Ariya such as dæna, søla, etc.

75. 욱가 장자 이야기
불환자인 성자는 색계와 무색계의 지복과 아라한과에 대한 욕구 때문에 선행을 할 것입니다. 아라한이 되어야 감각적 갈애가 제거됩니다. 불환자인 수행자의 경우 선행을 하는 동기는 아라한과를 얻고자 하는 욕구임이 『증지부』「욱가경(Ugga sutta)」(A8:21)과 「마음에 흡족한 공양을 올리는 자 경(Manāpadāyī sutta)」(A5:44)에 나오는 욱가(Uggā)장자193의 이야기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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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 욱가(Uggā)는 키가 크고 덕스러운 성품을 지녔기 때문에 Uggā(고상한)라고 불렸다 한다. 그는 세존을 처음 뵙고 예류과를 얻었고 뒤에는 불환과를 얻었다고 한다. 세존께서는 『증지부』(A1:14)에서 욱가를 마음에 흡족한 공양을 올리는 자(manāpa-dāyaka)들 가운데 으뜸이라고 칭찬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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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가는 웨살리(Vesāli)시의 장자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욱가 장자가 구족한 8가지 놀라운 덕성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한 비구가 세존께서 말씀하신 8가지 놀라운 덕성이 무언인지를 묻자, 욱가는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지만 자신은 다음과 같은 8가지 특유한 덕성을 구족했다고 말했습니다.
(1) 욱가가 부처님을 처음 뵈었을 때 고따마(Gotama)는 진정으로, 완전히 깨달은 부처님이라고 단호하게 결론지었습니다.
(2) 욱가가 부처님의 법문을 들었을 때 사성제를 관통하는 불환자의 통찰지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성관계의 금지를 포함한 오계를 지켰습니다.
(3) 욱가는 네 명의 젊은 아내를 두었습니다. 그런데 욱가는 아내들에게 자신은 이제 성관계를 하지 않을 것이니 부모의 집으로 돌아가거나 자신들이 선택한 남자와 재혼해도 좋다고 허락했습니다. 욱가는 가장 나이 많은 아내의 요청대로 그녀가 사랑하던 남자에게 보내면서 기꺼이 결혼식까지 치러주었습니다.
(4) 욱가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높은 덕성을 지닌 성자에게 보시하는데 쓰기로 결심하였습니다.
(5) 욱가는 비구들을 공손하게 대했습니다.
(6) 욱가는 비구들의 법문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경청하였으며, 비구들이 법문하지 않으면 자신이 법문을 했습니다.
(7) 천신들이 욱가를 찾아와서 “부처님의 교법194은 훌륭합니다.”라고 말하면, 욱가는 천신들이 그렇게 말하든 말하지 않던 법은 훌륭한 교법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욱가는 천신들과의 대화에 우쭐해 하지도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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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 교법(敎法)이라 번역한 사사나(sāsana)의 문자적 의미는 ‘메세지, 전갈'의 뜻으로 부처님께서 설하신 아홉 부류의 교설[九分敎]을 말한다. 이 구부경은 구부설(九部設) 또는 구부경(九部經)라고도 하며 서술의 형식이나 내용에 따라 경전을 분류한 체제이다.
➀ 계경(契經 Sutta): 경 가운데 장행 내지 산문의 부분.
➁ 중송(重頌 Geyya): 먼저 산문으로 서술한 후 다시 운문으로 읊고 있는 경의 부분.
➂ 수기(授記 Veyyākarana): 주석(註釋). 수역(授譯) 또는 별기(別記)라 번역. 불제자들의 생사인과를 적거나 불법의 심의(深意)를 분명히 적은 부분.
➃ 고기송(孤起頌 Gāthā): 운문체의 경문.
➄ 감흥어(感興語 Udāna): 부처님이 질문 받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감흥이 일어나 설한 시의 문구.
➅ 여시어(如是語 Itivuttaka):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로 시작하는 경으로 감흥어와 유사하다. 이는 주로 부처님의 윤리적인 가르침을 담고 있다..
➆ 본생경(本生經 Jātaka): 부처님의 전생담을 실은 경.
➇ 미증유법(未曾有法 Abbhuta-dhamma): 부처님의 공덕의 위대함을 찬탄한 부분. 또는 신비하고 불가사의한 미증유의 일들을 기록한 부분.
➈ 교리문답(方廣 Vedalla): 인명(因明), 정리(正理)에 의거, 불법의 깊은 뜻을 자세히 설한 부분
그리고 십이분교(十二分敎)로 분류할 경우는 여기에 ➉ 인연담(因緣譚 Nidāna) ⑪ 비유(譬喩 Apadāna) ⑫ 논의(論議 Upadesa)가 포함된다.
이와 같이 사사나(sāsana)는 부처님이 평생 설하신 교설(一代敎說)을 통틀어 일컫는 말로써 부처님의 가르침 또는 종교적 체계로서의 불교를 뜻한다. 영어로는 Dispensation of the Buddha, teaching, doctrine등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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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욱가는 낮은 욕계에 머물게 하는 오하분결(五下分結)195로부터 완전히 벗어났음을 스스로 알게 되었습니다.(즉 불환과를 얻었음을 스스로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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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 오하분결(五下分結 orambhāgiya-saṃyojana)은 10가지 족쇄(saṃyojana)중 처음 5가지 거친 족쇄를 말한다. 그리고 10가지 족쇄(saṃyojana)란 중생을 중생계에 붙들어 끊임없는 생사윤회를 반복하게 하는 것으로 다음과 같다.
① 유신견(有身見 sakkāya-diṭṭhi) ② 회의적 의심(vicikicchā) ③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戒禁取 sīlabbata-parāmāsa) ➃ 감각적 욕망(kāma-rāgā) ➄ 적의(paṭigha) ➅ 색계에 대한 집착(rūpa-rāga) ➆ 무색계에 대한 집착(arūpa-rāga) ➇ 자만(māna) ➈ 들뜸(uddhacca) ➉ 무명(無明 avijjā)
①부터 ➄까지가 앞에 나온 5가지 거친 족쇄(orambhāgiya-saṃyojana)인 오하분결(五下分結)이라 하고 ➅부터 ➉까지는 5가지 미세한 족쇄(uddhambhagiya-saṃyojana)인 오상분결(五上分結)이라고 한다. 예류자는 ①에서 ③을, 불환자는 ➃와 ➄를, 아라한은 나머지 ➅에서 ➉까지의 족쇄를 완전히 끊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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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이러한 여덟 가지 덕성을 구족하고 불환과를 얻은 욱가 장자가 자신이 소중히 아끼는 음식과 가사를 부처님께 바쳤습니다. 세존께서는 다음과 같이 보시의 성품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 즐거워하는 것이나, 자신이 매우 소중히 여기는 것을 보시하는 사람은 자신이 갈망하는 것을 얻는다. 높은 덕성을 지닌 성자에게 보시하는 사람은 보통사람들이 하기 힘든 보시행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것을 얻는다.”
몇 년 뒤 욱가는 죽어서 범천계인 정거천(淨居天)에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부처님을 찾아와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는 전생에 자신의 가장 소중한 음식을 부처님께 보시하였을 때 세웠던 서원의 진정한 목표였던 아라한과를 얻었노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다시 한 번 보시가 가져다주는 업의 이익을 말씀하셨습니다. 즉, 보시자가 아주 소중히 하는 것을 보시하면 아주 소중한 것을 얻고, 진귀한 것을 보시하면 진귀한 것을 얻으며, 아주 칭찬할 만한 것을 보시196하면 아주 칭찬할 만한 과위를 성취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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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증지부』의 「마음에 흡족한 공양을 올리는 자 경(Manāpadāyī sutta)」(A5:44)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읆으셨다.
“마음에 흡족한 공양을 올리는 자는 마음에 흡족함을 얻고, 으뜸가는 보시를 한 자는 다시 으뜸가는 것을 얻고, 뛰어난 보시를 한 자는 뛰어난 것을 얻고, 최상의 보시를 한 자는 최상의 경지를 얻도다. 으뜸가는 보시를 하고 뛰어난 보시를 하고 최상의 보시를 하는 사람은 태어나는 곳마다 긴 수명과 명성을 얻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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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자신이 가장 아끼고 소중히 하는 물건들을 보시하는 업의 과보로 거룩한 삶[梵行]을 사는 최고선, 즉 아라한과까지도 얻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욱가의 보시는 아라한과를 얻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러한 욕구, 즉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kāmā-upādāna)이 욱가의 동기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이라는 용어를 아라한과를 얻고자 하는 욕구와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을 반대하고 오히려 선한 의욕197(kusala-chanda)이란 명칭을 붙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럴 경우에 보시와 지계와 같은 성자들이 행하는 선업은 어떤 종류의 집착(upādāna)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설명을 해야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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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 의욕으로 옮긴 찬다(chanda)는 ‘자극, 고무, 열의, 의욕, 하고자 함, 의지’등의 뜻을 지녔다. 영어로는 intention, desire, will이라 하고 있다. 여기서 의욕이란 하고 싶어 함을 뜻하는데, 행위를 하여서 어떤 결과를 성취하고자 하는 것을 나타낸다. 이런 열의는 비난받아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탐욕(lobha)이나 갈망(rāga)과는 구별이 되어야 한다. 욕망과 갈망 등은 불선한 것이지만 열의는 다른 것과 같아지는 마음부수여서 선한 마음부수들과 함께 하면 고결한 목표를 달성하려는 선한 바람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물론 경에서는 종종 chanda가 lobha나 rāga의 동의어로 쓰이기도 하지만 아주 이로운 법으로 인정하고도 있다. 불선법을 버릴 열의를 일으키는 것과 선한 법을 증득하는 것을 설하는 경우에 이 단어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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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ICCASAMUPPÆDA 76
76. VIPASSANÆ PRACTICE AND UPÆDÆNA
The practice of vipassanæ, too, is to be attributed to kæmupædæna of a person who seeks permanent deliverance from evils of existence. Ordinary people have to contemplate to be free from the four upædænas while the Ariyas have to contemplate to overcome kamupædæna. Thus vipassanæ practice stands for the conquest of upædæna. According to Visuddhimagga and another commentary, viz. Sammohavinodani, avijjæ is indirectly the cause of good acts in that one ha s to do good for liberation from avijjæ and it is also said that bhævanæ or vipassanæ practice is one of the good acts in he sensual world which one has to do for such liberation.
The question then arises as to whether vipassanæ practice can lead to rebirth. The commentaries on A³guttara Nikæya and Pa¥¥hæna point to such a possibility. According to the commentary on A³guttara Nikæya, the first three right views lead to good rebirth, the last two right views, viz., the view that is born of fruition on the path (phala-sammæditthi) and the view that results from vipassanæ practice tend to liberate the yogø from life-cycle (samsæra). It says, however, on the authority of a learned thera (Culabhaya) that the yogø is subject to rebirth for seven times before he attains Arahatship. According to Pa¥¥hæna, contemplation of appamæna (conditions of existence) leads to rebirth in sensual sphere and the commentary defines appamæ¼a-cetanæ as maturity (gotrabhþ) cetanæ. Hence it is reasonable to assume that vipassanæ practice can give rise to rebirth before Arahatship is won.
But vipassanæ can ensure freedom from samsæra through insight into anicca, dukkha and anatta of all sense-objects, an insight that keeps off the defilement of craving for them. This nonarising of craving means non-arising of kamma and rebirth. Thus vipassanæ insight helps to offset kamma and its samsæric consequences by tada³ga-pahæna (overcoming by opposite).
Moreover, through inductive generalization the yogø realizes the anicca, dukkha and anatta of other phenomena that he has contemplated. Thus he keeps off the defilements and their kammic potentials by repression (vikkhambhana pahæna). Then there follows the Ariyan insight on the path that helps to root out the defilements. The emergence of this insight may be likened to the signing of an official letter by the head of a government department. The act of the officer-in-charge is in fact to give the finishing touch to the lot of work done by his subordinates. We cannot ignore the major contribution of vipassanæ practice in the pursuit of spiritual enlightenment any more than we can ignore the work of office staff or the cumulative effect of repeated use of a saw, that makes it finally possible for the wood-cutter to exterminate the three once and forever. As the sub-commentary on Visuddhimagga says: “Transcendent insight on the path helps to stamp out, root and branch only the defilements which the yogø has done his utmost to overcome through mundane vipassanæ insight.” Those who do not contemplate labour under the illusion of bliss and ego-entity. The illusion leads to craving, kammic efforts, rebirth and all the sufferings that are inherent in life cycle.

76. 위빠사나 수행과 집착
위빠사나 수행도 존재의 괴로움에서 영원히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의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kāmā-upādāna)이라고 여겨집니다. 범부는 네 가지 집착198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명상해야만 하지만 성자들은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kāmā-upādāna)을 극복하기 위해서 명상합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은 집착의 정복을 뜻합니다.「청정도론」과 「삼모하위노다니199」와 같은 주석서에 따르면 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선행을 해야만 한다는 점에서 무명은 선행의 간접적인 원인이며, 또 위빠사나 명상은 그러한 해탈을 위해 닦아야 하는 욕계의 선행 가운데 하나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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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 네 가지 집착(upādāna)은 다음과 같다.
①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kāmā-upādāna) -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에서 비롯된 집착.
② 사견에 대한 집착(diṭṭhi-upādāna) - 업과 그 과보는 없으며 내생, 정등각자, 아라한이 없다는 견해에 대한 집착.
③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sīlabbata-parāmāsa-upādāna) – 팔정도와 아무 상관 없는 의식과 의례를 행하는 것에 대한 집착.
④ 자아의 교리에 대한 집착(atta-vāda-upādāna) – 영혼, 자아, 살아있는 실체에 대한 믿음에 대한 집착.
199. 삼모하위노다니(Sammohavinodani)」는 아비담마 칠론 중의 하나인「분별론(Vibhanga)」의 주석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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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과연 위빠사나 수행으로 재생에 이르게 되는지에 대한 의문이 일어납니다. 『증지부』주석서와 「발취론」은 그러한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증지부』 주석서에 따르면200 처음 세 가지 바른 견해[正見]는 좋은 재생에 이르고, 마지막 두 가지 바른 견해[正見], 즉 과의 바른 견해(phala-sammādiṭṭhi)와 위빠사나의 바른 견해(vipassanā-sammādiṭṭhi)는 수행자로 하여금 윤회로부터 벗어나는데 이바지 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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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증지부』주석서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바른 견해가 있다.
➀ 업이 자신이라는 바른 견해(kammasakata-sammādiṭṭhi) ➁ 선의 바른 견해(jhāna-sammādiṭṭhi) ➂ 도의 바른 견해(magga-sammā-diṭṭhi) ④ 위빠사나의 바른 견해(vipassanā-sammādiṭṭhi) ⑤ 과의 바른 견해(phala-sammādiṭṭ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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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박식한 쭐라바야(Cūḷa-bhaya) 장로201에 따르면 수행자는 아라한과를 얻기 전까지 7번의 재생을 받는다고 합니다.「발취론」에 따르면, 무량함 (appamāṇa)에 대한 관찰은 욕계에서의 재생에 이른다고 하며, 주석서는 무량함202의 의도(appamāṇa-cetanā)를 종성203의 의도(gotrabhū-cetanā)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므로 아라한과를 얻기 전까지는 위빠사나 수행도 재생을 일으킬 수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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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 쭐라바야(Cūḷa-bhaya) 장로는 스리랑카의 유명한 주석가로 쭐라바야 삼장법사(Tipiṭaka-Cūḷa-bhaya)라고 불리웠다. 아주 명석한 기억력을 지녔다고 하는데 그의 이름은 주석서(VibhA.11, 16; Vsm.69, 394, 397)에서 종종 등장하고 있다.
202. 『증지부』주석서(AA.iii.231)에 따르면 무량함(appamāṇa)이란 그 범위를 잴수 있는 법이 아닌 출세간적인 것을 뜻한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무량은 자(慈)• 비(悲)• 희(喜)• 사(捨)의 사무량심(四無量心)을 뜻하지만 아비담마의 이런 문맥에서는 도와 과를 뜻하기도 한다.
203. 종성(gotrabhū)은 성인의 반열에 드는 순간의 마음으로 첫 번째 성자의 경지인 예류도를 얻기 바로 전 찰나에 범부의 이름을 버리고, 성자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찰나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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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위빠사나는 모든 감각대상의 무상• 고• 무아를 꿰뚫는 통찰지, 즉 감각대상에 대한 갈애라는 번뇌를 막는 통찰지를 통해서 윤회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을 보장합니다. 이렇게 갈애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업과 재생이 일어나지 않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지혜는 일시적 버림(tadaṅga-pahāna)으로 업과 그 윤회의 과보를 상쇄하는데 이바지 합니다.
게다가, 귀납적인 일반화를 통해서 수행자는 관찰하는 다른 현상들의 무상• 고• 무아를 깨닫습니다. 그리하여 억압에 의한 버림(vikkhambhana-pahāna)204으로 번뇌와 그 업의 잠재력을 피하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번뇌를 근절하는 성스러운 도의 지혜가 따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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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 억압에 의한 버림(vikkhambhana-pahāna)이란 삼매(samādhi)의 힘으로 번뇌(kilesa)를 일시적으로 몰아내거나 제압하는 것이다.「청정도론」(Vis.XXII.108)에 따르면 세 가지 버림(pahāna)이 있다. ➀ 억압에 의한 버림(vikkhambhana-pahāna) ➁ 반대되는 것으로 대체하여 버림(tadaṇga-pahāna) ➂ 근절에 의한 버림(samuccheda-pahāna)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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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스러운 도의 지혜가 출현하는 것은 정부 부서의 최고책임자가 공문서에 서명을 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부서 최고 책임자의 역할은 사실 부하직원이 한 많은 업무들을 마무리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깨달음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위빠사나 수행의 주요한 기여를 무시할 수 없는 것은 공문을 작성한 부서 직원의 공로를 무시할 수 없는 것과 같거나, 반복적인 톱질로 누적된 효과가 마침내 나무를 자르는 사람으로 하여금 나무를 한번에 쓰러뜨릴 수 있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청정도론」의 복주석서에서 “도의 초월지는 수행자가 세간의 위빠사나 지혜로 극복하려고 전력을 다한 번뇌들만을 쳐부수고, 뿌리 뽑는다."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명상하지 않는 사람들은 지복과 자아의 실재가 있다는 전도된 인식을 지닌 채 힘써 노력합니다. 이 전도된 인식으로 갈애, 업의 노력, 재생, 윤회에 내재하는 모든 괴로움에 이르게 됩니다.


PA¿ICCASAMUPPÆDA 77
77. LIFE-CYCLE AND THREE TIME-DIMENSIONS
The doctrine of Pa¥iccasamuppæda describes twelve causes and effects viz., (1) ignorance (2) kamma formations, (3) consciousness, (4) mind and body, (5) six senses, (6) sense-contact, (7) feeling, (8) craving, (9) clinging, (10) becoming (bhava), (11) birth (jæti), (12) old age and death.
According to the doctrine, ignorance and craving are the two main sources of suffering. There are two life cycles, the anterior life cycle and the posterior life cycle. The anterior life-cycle and begins with ignorance as its main source and ends with feeling, while the posterior life cycle beings with craving and ends with death. In the former life cycle ignorance (avijjæ) and kamma formations (sa³khæra) in the past life leads to rebirth while in the latter life cycle craving (tan¬æ) and clinging (upædæna) cause rebirth in future. The two life cycles show how a man’s lifetimes are linked with one another through cause and effect.
Again if the doctrine of dependent origination is to be described on time-scale, avijjæ and sa³khæra are two links in the past life, the links from viññæna to kammabhava concern the present life while birth, old age and death are the links that future has in store for us. Thus the doctrine refers to three time dimensions.

77.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
연기의 가르침은 (1) 무명(無明) (2) 업형성력인 상카라[行] (3) 식(識) (4) 정신-물질[名色] (5) 여섯 감각장소[六入] (6) 감각접촉[觸] (7) 느낌[受] (8) 갈애[愛] (9) 집착[取] (10) 존재[有] (11) 태어남[生] (12) 늙음과 죽음[老死]의 12가지 원인과 결과를 설하고 있습니다.
연기의 가르침에 따르면 무명과 갈애는 괴로움의 주된 근원입니다. 삶의 회전에는 전반부와 후반부라는 2개의 바퀴가 있습니다. 전반부의 삶의 회전은 무명을 그 주된 근원으로 하고 느낌으로 끝나며, 후반부의 삶의 회전은 갈애로 시작해서 죽음으로 끝납니다. 전반부의 삶의 회전에는 전생의 무명(無明)과 업헝성력인 상카라[行]가 태어남[生]에 이르는 반면 후반부의 삶의 순환에는 갈애와 집착이 내생에 태어남을 일으킵니다. 이 두 가지 삶의 바퀴는 사람의 일생이 어떻게 원인과 결과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또한, 연기법을 시간의 척도로 설명한다면, 무명과 상카라는 전생의 두 연결고리이고, 식에서 업으로서의 존재[業有]는 현생과 관련되어 있으며, 태어남, 늙음, 죽음은 우리에게 닥쳐올 내생의 연결고리입니다. 이렇게 연기법은 삼세(三世)205를 나타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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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 이렇게 12연기가 과거• 현재• 미래에 배당하여 과거의 2가지 원인(무명, 행), 현세의 5가지 과보(식, 명색, 육입, 촉, 수), 현재의 3가지 원인(애, 취, 유), 그리고 내생의 2가지 과보(생, 노사)라는 식으로 원인과 결과[因果]가 2중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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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ICCASAMUPPÆDA 78
78. FIVE CAUSES IN THE PAST
The doctrine describes the past cause only in terms of avijjæ and sa³khæra but in point of fact avijjæ is invariably followed by ta¼hæ and upædæna and sa³khæra too always lead to kamma-bhava. So Pa¥isambhidæmagga comments on the doctrine as follows.
“Avijjæ is ignorance that dominates us while doing a kammic deed. Sa³khæra means collection and exertion of effort. Ta¼hæ is the craving for the results of an action in the present life and hereafter. Upædæna is obsession with action and its result. kammabhava is volition. These five factors in the past constitute the cause of present rebirth.”
Thus we have to consider all these five links viz., avijjæ, ta¼hæ, upædæna, sa³khæra and kammabhava if we are to describe the past cause fully. Of these avijjæ, ta¼hæ and upædæna are labelled kilesavatta (cycle or round of defilements.) Sa³khæra and kammabhava are called kammavatta (cycle of actions). The commentary makes a distinction between sa³khæra and kammabhava, describing the prior effort, planning, etc., preparatory to an act as sa³khæra and the volition at the moment of doing the act as kammabhava. Thus seeking money, buying things, etc., prior to an act of dæna comprise sa³khæra while the state of consciousness at the time of offering is kammabhava. preliminary activities leading to an act of murder are sa³khæra while cetanæ or volition at the time of killing is kammabhava.

78. 과거의 다섯 가지 원인
연기의 가르침은 무명(無明)과 상카라[行]만으로 과거의 원인을 설명하지만, 사실 무명의 뒤에는 변함없이 갈애[愛]와 집착[取]이 따라옵니다. 그리고 상카라[行]도 항상 업으로서의 존재[業有]로 인도합니다. 그래서 「무애해도」에서는 연기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석하고 있습니다.
“무명은 우리가 업의 행위를 하는 동안 우리를 지배한다. 상카라는 노력의 집합과 발휘를 뜻한다. 갈애는 현생과 내생의 업의 과보에 대한 갈애이다. 집착은 업과 그 과보에 집착하는 것이다. 업으로서의 존재[業有]는 의도이다. 과거의 이러한 5가지 요소가 현재의 재생의 원인을 이룬다.”
그래서 우리가 전생의 원인을 완전히 설명할 때는 (1) 무명(無明) (2) 갈애[愛] (3) 집착[取] (4) 상카라[行] (5) 업으로서의 존재[業有]라는 이 다섯 가지 연결 고리를 모두 고려해야만 합니다. 이 가운데 (1) 무명(無明) (2) 갈애[愛] (3) 집착[取]을 번뇌의 회전(kilesa-vaṭṭa)이라고 합니다. (4) 상카라[行] (5) 업으로서의 존재[業有]는 업의 회전(kamma-vaṭṭa)이라고 합니다.
주석서는 상카라[行]를 상카라의 행위가 있기 전에 선행하는 앞선 노력과 계획 등으로, 업으로서의 존재[業有]는 행위를 하는 순간의 의도로 설명하면서 구별을 짓고 있습니다. 그래서 보시행의 예비단계로 돈을 구하고, 물건을 사는 일 따위가 상카라[行]이고, 보시행을 하는 순간의 마음상태가 업으로서의 존재[業有]입니다. 살인을 하는 예비 행위들이 상카라[行]이고, 살인을 하는 순간의 의도가 바로 업으로서의 존재[業有]입니다.


PA¿ICCASAMUPPÆDA 79
79. DISTINCTION BETWEEN SA£KHÆRA AND KAMMABHAVA
The other kind of distinction between sa³khæra and kammabhava is based on impulsemoments. It is said that an act of murder or alms giving involves seven impulse-moments. The first six impulse- moments are called sa³khæra while the last is termed kammabhava. The third way of making the distinction is to describe volition (cetanæ) as kammabhava and other mental states associated with volition as sa³khæra.
The last method of classification is helpful when we speak of good deeds in rþpa and arþpa spheres. All the three methods apply in the case of good or bad acts in sensual world. But the first method is most illuminating for those who are not well informed.
Alternatively, Visuddhimagga attributes rebirth to flashbacks, visions and hallucinations that hold a dying person’s attention at the last moment of his life. So according to this commentary, kammabhava may be defined as the volition (cetanæ) that motivated his good or bad acts in the past and the sa³khæra as the mental state conditioned by his deathbed experiences.

79. 상카라[行]와 업으로서의 존재[業有]
상카라[行]와 업으로서의 존재[業有]간의 또 다른 구별은 자와나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살인이나 보시행은 일곱 가지 자와나를 포함한다고 합니다. 처음 6개의 자와나는 상카라[行]이고 마지막 자와나는 업으로서의 존재[業有]라고 합니다.
상카라[行]와 업으로서의 존재[業有]를 구분 짓는 세 번째 방법은 의도(cetanā)를 업으로서의 존재[業有]라고 하고 다른 마음부수[心所]들을 상카라[行]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마지막 구분 방법은 우리가 색계와 무색계의 선행을 말할 때 유용합니다. 이 세 가지 모든 구분 방법은 욕계의 선하거나 악한 행위들의 경우에 적용됩니다. 하지만 첫째 방법은 잘 알고 있지 못한 사람들에게 가장 교화적입니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재생은 임종의 순간에 죽어가는 사람이 주의를 기울이는 회상, 표상, 환영중의 하나로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청정도론」에 따르면 업으로서의 존재[業有]는 전생의 선행이나 악행을 하게끔 한 의도(cetanā)로, 상카라는 임종의 체험으로 조건 지어지는 마음부수로 정의될 수 있다고 합니다.


PA¿ICCASAMUPPÆDA 80
80. PRESENT EFFECT DUE TO PAST CAUSE
Thus owing to the rounds of defilements and kamma comprising the five causes in the past, there arises rebirth-consciousness to gether with-mind-body, six bases impressions and feeling. These five effects are collectively called vipæka vatta (round of effects). Because of their ignorance, common people have the illusion of pleasantness about every sense-object and mind-object. They develop craving, thereby starting again the vicious cycle of causes and effects that represent their rounds of suffering.
Consciousness, the six sense-bases, etc arise as the kammic result of past kammas. It is a matter of cause-and-effect relationship just like all other phenomena. This leaves no room for ego, God or Prime Mover. The only difference is the moral law governing this relationship, the nature of feeling, whether pleasant or unpleasant, being dependent on the good or bad sa³khæra in the past. In reality there is no person who has pleasant or unpleasant feeling nor any being who causes him to have such an experience. Life is only the continuum of consciousness, impression, etc as conditioned by five factors, viz., ignorance, craving, etc.

80. 과거의 원인에서 비롯된 현재의 결과
그리하여 과거의 다섯 가지 원인을 이루고 있는 번뇌의 회전(kilesa-vaṭṭa)과 업의 회전(kamma-vaṭṭa)때문에, 정신-물질[名色], 여섯 감각장소[六入], 감각접촉[觸], 느낌[受]과 함께 재생연결식이 일어납니다.
이 다섯 결과를 뭉뚱그려서 과보의 회전(vipāka-vaṭṭa)이라고 합니다. 무명 때문에 범부들은 모든 감각대상과 마노의 대상, 즉 육경(六境)이 즐거움이라는 전도된 인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범부들은 갈애를 일으키고, 그에 따라 괴로움의 회전을 의미하는 원인과 결과의 악순환이 다시 되풀이 됩니다.
식(識), 여섯 감각장소[六入]등은 과거 업의 과보로 일어납니다. 그것은 다른 모든 현상들처럼 원인과 결과의 문제입니다. 여기에는 자아, 신, 제 1운동자가 있을 여지가 없습니다. 유일한 차이점은 이 인과관계를 지배하는 도덕적 법칙과 즐겁거나 괴롭거나 간에, 과거의 선하거나 불선한 상카라에 따르는 느낌의 본성입니다. 실제로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을 갖는 사람(자아)은 없으며, 그러한 느낌을 갖도록 원인을 제공하는 존재(자아)도 없습니다. 삶이란 무명, 갈애, 집착 등의 요소에 의해 조건 지어진 식(識), 감각접촉[觸], 느낌[受] 등의 연속체일 뿐입니다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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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 존재[有]로 번역되는 바와(bhava)를 서양에서 becoming으로 옮기고 있듯이 우리의 삶은 그냥 존재가 아니고 갈애(taṇhā)와 집착(upādāna)을 통해서 끊임없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즉 존재는 어떤 고정된 불변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생멸하는 오온(五蘊)이 흐르는 진행과정 그 자체임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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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ICCASAMUPPÆDA 81
81. KNOWLEDGE FOR VIPASSANÆ PRACTICE
Those who have a smattering of Paticcasamuppæda or Abhidhammæ say that it is impossible to practise meditation without a knowledge of these teachings,. But in fact the yogø who practices under the guidance of a learned teacher need not bother about higher Buddhist philosophy, for he can follow the teacher’s instructions if he knows only that life is a mental and physical process characterized by impermanence, suffering and insubstantiality. The adequacy of this simple knowledge to meet the intellectual need of the yogø who is bent on Arahatship is borne out by the Buddha in Culatanhæsankhaya sutta. There the Lord goes on to talk about vipassanæ practice. In the sutta the yogø’s understanding of næmarþpa is termed “abhijænæti” which, says the commentary, means full comprehens ion and refers to næmarþpa paricchedañæ¼a and paccayapariggahañæ¼a.
Through contemplation, the yogø knows all phenomena analytically as anicca, dukkha and anatta (parijænæti). Here the Pæ¹i terms refer to sammæ-sanañæ¼a and other vipassanæ insights. As regards Pa¥iccasamuppæda, a knowledge of the conditionality and cause-effect relationship in life that rules out a being ego or self is sufficient. It is not necessary to know the twelve links or the twenty main points of the doctrine thoroughly. If the practice of vipassanæ presupposes such a comprehensive knowledge, it would be unthinkable for a man of low intelligence like, say, thera Culapanna. The thera’s memory was so poor that he could not remember a few gæthæs that he had learnt for four months. Nevertheless, he attained Arahatship in a few hours when he practised contemplation as instructed by the Buddha.
Another laywoman, Matikammætæ by name attained the third stage (anægami) on the holy path in advance of some bhikkhus who were her meditation teachers. She did not know much about abhidhamma and Pa¥iccasamuppæda. There were many other yogøs like this woman and Culapanna thera. So it is possible for a yogø to attain the holy path if he contemplates even though he may not have thoroughly learnt the higher teachings of the Buddha.
Not to know the real nature of pleasant or unpleasant feeling is avijjæ (ignorance). It is ta¼hæ to like a sense-object and it is upædæna to have craving for it. To seek the object of one’s desire, to do good or evil for one’s happiness or welfare in the present life or hereafter means sa³khæra and kammabhava. These five factors are the present causes and they give rise to rebirth after death. The doctrine of Paticcasamuppada mentions only three causes viz., vedanæ, ta¼hæ and upædæna but in reality these three factors imply two other causes viz, avijjæ and sa³khæra since these two are the mainsprings of ta¼hæ and kammabhava respectively. So Pa¥isambhidæmagga described all these five factors as causes of rebirth in future.

81. 위빠사나 수행에 필요한 지식
연기나 아비담마에 대한 피상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들은 연기나 아비담마에 대한 지식 없이 위빠사나를 수행하기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삶이란 무상• 고• 무아가 특성인 정신-물질의 과정인 것만 알고 있으면 스승의 지도를 따를 수 있기 때문에 학식 있는 스승의 지도를 받는 수행자는 심오한 불교철학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러한 간단한 지식만으로도 아라한과를 얻고자 하는 수행자의 지성적 요구를 충분히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것은 『중부』「애진소경(Cūḷataṇhāsankhaya Sutta)」(M.37)에 나오는 부처님의 말씀으로도 충분히 입증됩니다. 이 경에서 세존께서는 계속해서 위빠사나 수행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경전에서는 정신-물질에 대한 수행자의 이해를 ‘최상의 지혜로 안다’는 뜻인 아비쟈나띠(abhijānāti)207라고 하고 있으며 주석서에서는 통달지(pariññā)를 뜻하며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nāma-rūpa-pariccheda-ñāṇa)와 원인과 결과를 구별하는 지혜(paccaya-pariggaha-ñāṇa)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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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최상의 지혜로 안다(abhijānāti)’는 것은 무상• 고• 무아라고 안 것의 통달지(ñāta-pariñña)를 통해 그렇게 안다는 것이다. ‘철저하게 안다(parijānāti)’라는 것은 마찬가지로 조사(調査)의 통달지(tīraṇa-pariññā)를 통해 그렇게 안다는 것이다.(AA.iv.43). 안 것의 통달지와 조사의 통달지 등의 통달지(pariññā)에 대해서는「청정도론」(Vis.XX.3~5)을 참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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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을 통해서 수행자는 모든 현상을 무상• 고• 무아로 분석하여 철저하게 압니다(parijānāti). 여기서 철저하게 안다는 뜻인 빨리어 빠리자나띠(parijānāti)208는 명상의 지혜(sammasana-ñāṇa)와 다른 위빠사나 지혜를 가리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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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 빠리자나띠(parijānāti)는 ‘꿰뚫어 안다’ ‘철저하게 안다’라는 뜻으로 여기에서 파생된 동사가 통찰지로 번역되는 paññ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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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법은 존재로써의 자아나 나를 배제하는 삶의 조건(paccaya)과 원인과 결과 관계에 대한 지식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연기법의 12각지나 20가지 주요 사항을 모두 완벽하게 알 필요는 없습니다. 만약 위빠사나 수행이 그러한 종합적인 지식을 전제조건으로 한다면 쭐라빤타까(Cūḷa-pantaka)존자209처럼 머리 나쁜 사람은 수행할 엄두조차 못 냈을 것입니다. 존자는 기억력이 너무 나빠서 4개월 동안 배운 몇 구절 게송도 외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의 지도에 따라 명상을 닦아서 몇 시간 만에 아라한과를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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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 쭐라빤타까(Cula-pantaka)비구는 라자가하(Rājagaha)의 부유한 상인의 딸에게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하인과 눈이 맞아서 라자가하를 도망 나가서 살았다고 한다. 그의 형은 마하빤따까(Mahā-panthaka)라고 불렸다. 두 형제는 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jātattā) 빤따까(Panthaka)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와 하인이 도망 다니면서 길에서 낳았기 때문이다. 그는 후에 형과 함께 외갓집에 보내져서 양육되었다. 그의 형은 외할아버지를 따라 부처님을 뵈러 다녔기 때문에 먼저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다. 그도 형의 권유로 출가하여 형이 준 게송(A.iii.239)을 넉달이나 외웠으나 외울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형은 그를 쫒아내려 했지만 부처님께서는 그에게 천 조각을 주시면서 ‘먼지 닦기(rajo-haraṇa), 먼지 닦기’라고 반복해서 외우라고 하셨고 그런 방법을 통해서 무애해(無碍解)와 육신통(六神通)을 갖춘 아라한이 되었다. 45자모(字母)로 구성된 게송은『증지부』(A.iii.239)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마치 향기로운 꼬까나다의 연꽃이 아침에 향내음을 풍기면서 피듯이 멀리 빛을 드리우신 부처님을 보라.
마치 허공에서 빛나는 태양과 같구나.”(A.iii.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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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여신도, 마띠까마따(Mātika-mātā)는 자신에게 명상을 지도해주던 비구보다도 먼저 성스러운 도의 세 번째 단계인 불환과를 성취했습니다.
그녀는 아비담마와 연기에 대해 많이 알지 못했습니다. 이 여신도와 쭐라빤타까 같은 수행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자가 부처님의 심오한 가르침을 철저히 배우지 않았더라도 명상을 하면 성스러운 도를 얻는 것이 가능합니다.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의 진정한 본성을 알지 못하는 것이 바로 무명입니다. 감각대상을 좋아하는 것이 갈애이며, 감각대상을 갈구하는 것이 집착입니다. 자신의 욕망의 대상을 추구하는 것과 현생이나 내생의 자신의 행복과 안녕을 위해서 선행이나 악행을 하는 것은 상카라[行]와 업으로서의 존재[業有]를 뜻합니다. 이 다섯 가지 요소가 현재의 원인이며 죽은 뒤에 재생이 일어나도록 합니다.
연기법은 느낌[受], 갈애[愛], 집착[取]의 세 가지 원인만 언급하지만 사실 이 세 가지 요소는 무명(無明)과 상카라[行]라는 다른 두 가지 원인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이 무명(無明)과 상카라[行]는 각각 갈애[愛]와 업으로서의 존재[業有]의 원동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애해도」는 이러한 모든 다섯 가지 요소를 미래에 일어날 재생의 원인으로 설명합니다.


PA¿ICCASAMUPPÆDA 82
82. REMOVING THE PRESENT CAUSES
Every good or evil act means the complete conjunction of these five present causes and occasions for such a conjunction in a single lifetime may number by thousands. Under certain circumstances these causes may lead to rebirth after death or two or three rebirths successively.
Every existence is bound up with old age, grief, death, etc. and if we wish to avoid these sufferings, we will have to remove the present causes. To this end we should note all physical phenomena, “seeing”, “hearing” etc at the moment of their arising. With the development of concentration, we note their instant passing away and become aware of their impermanence, unsatisfactoriness and unreliability. This awareness helps us to overcome ignorance and illusion that fuel craving, attachment and kammic effort: we thus keep the five present causes inoperative and inactive, thereby forestalling rebirth and consequent suffering.
This method of removing the causes is labelled tada³gapahæna-overcoming some defilements through contemplation. By this method the yogø attains tada³ganibbüti-partial extinction of defilements through contemplation. Later on there arises the insight on the Ariyan path which means the extinction of all sa³khæra and the realization of Nibbæna (samcchedapahæna). The defilements and kammas are then done away with once and forever. The yogøs who attain sotapatti stage overcome the defilements and kammas that lead to the lower worlds, and those that may cause good rebirth for more than seven life times, the yogøs at the sakadægæmi stage overcome those that
may cause more than two rebirths while the yogøs at the anægæmi stage remove those that lead to rebirth in sensual worlds, Finally the yogø who attains aræhatta stage eradicates the remaining defilements and kamma. In other words he becomes an Arahat, the Noble one who is worthy of honour because he is wholly free from defilements.

82. 현재 원인의 제거
모든 선업이나 악업은 이러한 5가지 현재 원인과 계기의 완벽한 결합을 뜻하며 그러한 결합은 한 생애에 수없이 많을 수 있습니다. 어떤 환경에 처하면 이러한 원인은 죽고 나서 태어나게 하거나 두 번, 세 번의 재생을 연달아 일으킬 것입니다. 모든 생은 늙음, 근심, 죽음 등과 결부되어 있으며, 우리가 이러한 괴로움을 피하고자 한다면 현재의 원인을 제거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우리는 모든 물질적 현상들이 일어나는 순간 “봄” “들림”등으로 주시해야 합니다. 집중이 깊어짐에 따라, 우리는 모든 물질적 현상들이 즉시 사라짐을 주시하게 되고 그들이 무상하고, 불만족스럽고, 의지할 수 없는 것임을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앎은 갈애, 집착, 업의 노력을 부추기는 무명과 전도된 인식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다섯 가지 현재의 원인들이 작용하지 않고 활동하지 못하게 하며, 그래서 재생과 재생의 결과로 생긴 괴로움을 미연에 방지하게 됩니다.
이렇게 원인을 제거하는 방법을 일러 관찰을 통해서 몇몇 번뇌를 극복하는 일시적 버림, 또는 반대되는 것으로 대체하여 버림(tadaṅga-pahāna)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수행자는 관찰을 통해서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적멸(tadaṅga-nibbuti)을 얻습니다.
나중에 모든 상카라의 소멸과 열반의 실현을 뜻하는 성스러운 도의 통찰지가 생깁니다. 이것이 근절에 의한 버림(samuccheda-pahāna)입니다. 그때 번뇌와 업은 일거에 완전히 제거됩니다. 예류과를 얻은 수행자는 악처에 떨어지게 하는 번뇌와 업을 극복하며, 이로써 선처에서 7번 이상의 재생할 것입니다.
일래과를 얻은 수행자는 2번 더 재생하도록 하는 번뇌를 극복하며, 불환과를 얻은 수행자는 욕계에 재생하게 하는 번뇌와 업을 제거합니다. 마침내 아라한과를 얻는 수행자는 남아있는 번뇌와 업을 모두 쳐부수게 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수행자는 번뇌로부터 완전히 벗어났기 때문에 공양 받아 마땅한 성자인 아라한이 됩니다.


PA¿ICCASAMUPPÆDA 83
83. THE ARAHAT’S OUTLOOK ON LIFE
The arahat has no illusion about the nature of sense-objects. He is aware of their unwholesomeness and this means he realizes the truth of dukkha because he is free from ignorance (avijjæ). So he has no craving for anything. Inevitably he has to fill the biological needs of his physical body such as eating, sleeping, etc., but he regards them as conditioned (sa³khæra) dukka and finds nothing that is pleasant to him.
The question arises as to whether he should long for speedy death to end such suffering. But the desire for early death or dissolution of the physical body too is a destructive desire and the Arahat is free from it. So there is an Arahat’s saying in the Theragæthæ that he has neither the wish to die nor the wish to live.
The Arahat does not wish to live a long life for life means largely the burden of suffering inherent in khandhæ. Although the burden of khahdhæ needs constant care and attention, it is not in the least reliable. To many middle-aged or old people, life offers little more than frustration, disappointment and bitterness. Living conditions go from bad to worse, physical health declines and there is nothing but complete disintegration and death that await us. Yet because of ignorance and attachment many people take delight in existence. On the other hand the Arahat is disillusioned and he finds life dreary and monotonous. Hence his distaste for life. But the Arahat does not prefer death either. For death wish is an aggressive instinct which he has also conquered. What he wants is to attain Nibbæna, a longing that is somewhat analogous to that of a worker who wishes to get his daily or monthly wage.
The worker does not like to face hardship and privations for he as to work inevitable just to make his living but he does not want to lose his job either. He wants only money and looks forward to payday. Likewise, the Arahat waits for the moment when he should attain Nibbæna without anything left of his body mind complex. So when they think of their life span, the Arahats wonder how long they will have to bear the burden of næmarþpa khandha. Because of his disillusionment, the Arahat’s life-stream is completely out off after Nibbæna, hence it is called anupædisesa-nibbäna.

83. 아라한의 인생관
아라한은 감각대상의 본성에 전도된 인식이 없습니다. 아라한은 감각대상의 불선(不善)을 알고 있고, 이는 무명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괴로움의 진리[苦諦]를 깨달았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아라한은 무엇에도 갈애가 없습니다.
아라한도 불가피하게 식사를 하고, 잠을 자는 등의 생리적인 욕구를 들어줘야 하지만 이러한 것들을 형성됨에 기인한 괴로움(行苦 saṅkhāra-dukkha)으로 생각하고 기뻐할 만한 어떤 것도 찾지 못합니다.
그러면 아라한이 이러한 괴로움을 끝내기 위해 빨리 죽기를 바라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하지만 때 이른 죽음이나 육신의 해체를 바라는 마음은 파괴적 욕망으로, 아라한은 거기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래서「장로게」(Thag.654; 606; 1003)에는 죽음을 바라지도 않고 삶을 바라지도 않는다고 하는 어떤 아라한의 게송210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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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장로게(長老偈)」(Thag.654)에는 레와따(Revata) 존자의 다음과 같은 게송이 전해진다.
“나는 죽음을 기뻐하지도, 삶도 기뻐하지도 않는다. 고용된 사람이 그저 월급날만 기다리는 것처럼 나는 죽음이 올 날만을 기다린다.”(Thag.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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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크게 보아 오취온(五取蘊)에 내재된 괴로움의 짐을 뜻하기 때문에 아라한은 오래 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비록 오취온의 부담은 끊임없이 보살핌과 돌봄을 요구하지만 조금도 의지할 만하지 않습니다. 많은 중년기의 사람과 노인에게 삶은 좌절, 실망, 괴로움에 지나지 않습니다.
삶의 조건은 갈수록 나빠지고, 건강은 점점 나빠지며 완전한 무너짐과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대부분 무명과 집착 때문에 생을 즐거워합니다. 반면 아라한은 무명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삶을 지루하고 따분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아라한은 삶에 염증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라한이 죽음을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죽고자 하는 욕구는 아라한이 이미 정복한 공격적인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아라한이 바라는 것은 완전한 열반[般涅槃]에 드는 것으로, 이러한 바람은 근로자가 일당이나 월급을 받고자 하는 것과 어느 정도 비슷합니다.
근로자는 생계수단을 위해 불가피하게 일해야 하기 때문에 어려움과 고난에 처하기를 바라지 않지만 그렇다고 직장을 잃는 것을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오직 돈으로 급여 받는 날만 손꼽아 기다립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라한도 완전한 열반을 얻는 순간만을 기다립니다.
그래서 아라한은 자신의 수명을 생각하면 얼마나 더 정신-물질의 무더기인 오온(五蘊)의 무거운 짐을 더 짊어져야 하는지 생각합니다. 무명이 사라졌기 때문에 열반에 들고나면 아라한의 삶의 흐름은 완전히 끊어집니다. 그래서 이를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211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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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열반(涅槃)으로 음역한 nibbāna는 ‘불어서 꺼진’의 뜻이다. 경전에서는 탐욕(rāga), 성냄(dosa), 어리석음(moha)의 불이 완전히 꺼진 것을 열반이라고 설명한다. 이 열반은 진정한 불교신자라면 반드시 추구해야 하는 지복이자 최고선이다. 이 열반은 출세간이며 형성된 것을 완전히 벗어난 형성되지 않은 것이며 고요함을 특징으로 하는 하나의 본성을 가졌다. 비록 열반은 본성에 있어서는 하나지만 남음(upādi)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측면에서 보면 두 가지가 있다.
①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 saupādisesa-nibbāna): ‘받은 것이 남아 있는 열반’이라는 뜻이며 아라한의 경우 번뇌는 완전히 소멸하였지만 그의 수명이 남아 있는 한 과거 집착의 산물인 오온(五蘊)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②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 anupādisesa-nibbāna): ‘남음이 없는 열반’이라는 뜻이며 아라한의 수명이 다하고 입멸(入滅)을 하게 되면 이러한 오온(五蘊)까지도 완전히 멸하기 때문에 이런 열반을 완전한 열반(般涅槃 parinibbāna)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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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ICCASAMUPPÆDA 84
84. NOT ANNIHILATION BUT EXTINCTION OF SUFFERING
Those who believe in ego or soul deprecate Nibbäna as eternal death of a living being. In reality it is the total extinction of suffering that results from the non-recurrence of psychophysical phenomena together with their causes viz, kamma and defilements. So the Buddha points out the cessation of upædæna arising from the complete cessation of craving, the process of becoming (bhava) ceasing to arise due to cessation of upædæna and so on. With the non-arising of rebirth, there is the complete cessation of old age, death and other kinds of suffering.
Here the popular view is that birth, old age and death are evils that afflict living beings. But in point of fact these evils characterize only the psychophysical process and have nothing to do with a living entity. Since there is no ego or soul, it makes no sense to speak of the annihilation of a living being with the cessation of rebirth and suffering. So those who regard Nibbæna as annihilation are not free from the illusion of ego-entity. To the intelligent Buddhist, Nibbæna means only cessation of suffering. This is evident in the story of bhikkhu Yamaka in the time of the Buddha.

84. 단멸이 아닌 괴로움의 소멸
자아나 영혼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은 열반을 중생의 영원한 죽음이라고 비난합니다. 사실 열반은 정신-물질 현상과 그 원인인 업과 번뇌가 회전하지 않음으로써 비롯되는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갈애가 완전히 소멸되면 집착이 소멸되고, 집착이 소멸되면 존재[有]가 소멸됨을 지적하셨습니다. 재생이 일어나지 않음으로써, 늙음, 죽음, 다른 괴로움도 완전히 소멸합니다.
태어남, 늙음, 죽음이 중생을 핍박하는 괴로움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견해입니다. 하지만 사실상 이러한 괴로움은 정신-물질 과정에 의해서만 특징지어지는 것으로, 변하며 느끼는 살아있는 모습일 뿐입니다. 실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자아나 영혼은 없기 때문에 재생과 괴로움의 소멸을 가지고서 중생의 단멸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열반을 단멸(斷滅)로 여기는 사람들은 자아의 실재가 있다는 전도된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지혜로운 불교신도에게 열반은 그저 괴로움의 소멸을 뜻할 뿐입니다. 이는 『상응부』「야마까경(Yamaka Sutta)」(SN.22.85)에 나오는 부처님 당시의 야마까(Yamaka) 비구 이야기에서 잘 드러납니다.


PA¿ICCASAMUPPÆDA 85
85. STORY OF YAMAKA
Yamaka believed that the Arahat was annihilated after his death. He clung to his view although other bhikkhus pointed out its falsity. Then Særiputræ summoned him. Questioned by the elder thera, Yamaka admitted that all the five khandhæs are impermanent and suffering, that it would be a mistake to regard them as one’s possession or self. Særiputræ told him to see the five khandhæs as they really are. He would then become disillusioned, detached and liberated.
While hearing the sermon, Yamaka attained the sotæpanna stage. He was now free from false beliefs. Særiputræ then questioned him again. In response to the thera’s questions, Yamaka said that he did not identify the Arahat with the physical body. The perception, the feeling, conformations (sa³khæra) or the consciousness. Nor did he believe tha t the Arahat existed else where without the rþpa, vedanæ or any other khandhæ. Therefore since the Arahat or a living entity is not to be found in the five khandhæs even before death, it makes no sense to speak of the Arahat’s annihilation after his parinibbæna.
Yamaka confessed his mistaken view. He was now free from it and he knew what to say about the destiny of the Arahat. If someone were to ask him, “What happens when the Arahat passes away? he would answer, “the death of the Arahat means the complete cessation of suffering inherent in the impermanent five khandhæs.”
This statement about the Arahat was confirmed by Særiputræ. The thera likened the khandhæs to the murderer who poses as a friend and said that identifying the khandhæs with atta is like welcoming the murderer, etc.
Here the thera Yamaka at first believed that the Arahat was annihilated after death, that there was nothing left. This belief presupposes the illusion of ego-entity and so the annihilation-view of Nibbæna is called ucchedaditthi, the view that Nibban means the negation of atta after death. When he realized the truth and attained sotæpanna, Yamaka said that the death of the Arahat means the complete extinction of suffering inherent in the impermanent five khandhæs.
To sum up the way to the cessation of suffering, failure to note seeing, hearing and other psycho-physical phenomena leads to the arising of avijjæ, ta¼hæ, upædæna, kamma and sa³khæra that in turn cause birth, old age and death in future. Mindfulness of all phenomena forestalls the five present causes viz, avijjæ, etc and the five consequences that involve suffering.

85. 야마까 비구 이야기
야마까 비구는 아라한은 죽고 나면 단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비구들이 그러한 견해의 잘못됨을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장로는 여전히 자신의 견해를 고집했습니다. 사리뿟따 존자가 그를 불러서 묻자, 야마까는 오온(五蘊)은 모두 무상하고 괴로움이며, 그러한 오온을 자신의 소유나 자아로 여기는 것은 잘못임을 인정했습니다. 사리뿟따는 장로에게 오온을 있는 그대로 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무명에서 벗어나 집착을 여의고 속박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리뿟따의 법문을 듣는 동안 야마까는 예류과를 얻고는 그릇된 견해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사리뿟따는 야마까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사리뿟따의 질문에 대해 야마까는 아라한을 육체적인 것으로 몸[色], 느낌[受], 인식[想], 상카라[行], 식(識)과 동일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또 아라한이 색온(色蘊), 수온(受蘊)이나 다른 오온들 없이 다른 곳에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라한, 즉 살아있는 실재는 죽기 전에도 오온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기에, 아라한이 완전한 열반[般涅槃]에 든 뒤에 아라한의 단멸에 대해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야마까는 자신이 그릇된 견해를 가졌음을 시인했습니다. 이제 야마까는 그릇된 견해에서 벗어났으며 아라한의 사후운명에 대해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를 알았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그에게 “아라한은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라고 물었다면 야마까는 “아라한의 죽음은 무상한 오온에 내재하는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을 뜻합니다.”라고 답변했을 것입니다.
이 말이 옳다는 것을 사리뿟따가 확인해주었습니다. 장로는 오온을 친구로 가장한 살인자에 비유하고, 오온을 자아와 동일하게 여기는 것은 마치 살인자를 환영하는 것과도 같다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야마까는 맨 처음 아라한은 죽으면 단멸하고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견해는 자아의 실재가 있다는 전도된 인식을 전제로 하고, 이러한 단멸론적인 시각으로 열반을 보는 것을 단견(斷見)이라고 합니다. 이 단견은 열반이란 죽은 뒤의 자아(atta)를 부정하는 것을 뜻합니다. 야마까가 진리를 깨달았을 때 예류과를 얻었으며, 아라한의 죽음은 무상한 오온에 내재하는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을 뜻한다고 말했습니다.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요약합니다. 보고, 듣는 정신-물질의 현상을 주시하지 못하면 무명(無明), 갈애[愛], 집착[取], 업(業), 상카라[行]가 일어나며, 이로써 미래에 태어남[生], 늙음• 죽음[老死]이 있습니다. 모든 현상에 대한 알아차림은 무명 등과 같은 현재의 다섯 가지 원인과 괴로움을 포함하는 다섯 가지 과보가 생기는 것을 미연에 방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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