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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글 제목: (Mahāsi Sayādaw)86~92
전체글올린 게시글: 2015-12-30, (수) 4:17 am 

가입일: 2015-01-30, (금) 10:13 pm
전체글: 103
PA¿ICCASAMUPPÆDA 86
86. BHIKKHUNØ VAJIRÆ ON THE NATURE OF KHANDHÆS
Moreover, it is the extinction of suffering that is underscored in the famous saying of bhikkhunø Vajiræ. While she was sitting under a tree near Jetavana monastery, Mæra appeared and in order to scare and discomfit her, asked her “Hey, bhikkunø! who created a living being? Where is the creator? How did a living being originate and how would he come to an end?” Bhikkhunø Vajira replied, “O, Mæra! What do you think is a living being? Is not your belief in a living being an illusion? What you regard as a living being is nothing but a heap of sa³khæra. No being is to be found in this heap, a living being (sattavæ) is merely a term for the collection of five khandhæs viz., rþpa, vedanæ, etc just as “chariot” is the term for the combination of wheel, axle, etc; there is no being but only the group of five khandhæs. That cause suffering-In fact it is only suffering (dukkha) that arises, exists and ends. There is no arising and extinction of anything other than dukkha.” Therefore a living being is to be understood only in the popular acceptation of the term. It does not exist in the absolute sense; there is only psycho-physical process which comprises ignorance, craving, attachment, kamma and kammic effort as causes and consciousness, body-mind, sense bases, impression and feeling as effects. These effects in turn become causes that give rise to rebirth and suffering.

86. 오온의 성질에 대한 와지라 비구니의 말
게다가, 『상응부』「와지라경(Vajirā Sutta)」(SN.5.10)에 나오는 와지라(Vajirā) 비구니의 유명한 말에서도 열반은 괴로움의 소멸임이 분명히 나타납니다. 와지라 비구니가 기원정사 근처의 나무아래에 좌정하고 있을 때 마라가 나타나서 그녀를 겁을 주고 당황하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봐, 비구니! 누가 중생을 창조했느냐? 그 창조자는 어디에 있느냐? 중생은 어떻게 생겨났고, 또 어떻게 끝나는가?”
와지라 비구니는 대답했습니다. “오, 마라여! 너는 중생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네가 중생에 대해 가지고 있는 믿음은 전도된 인식이 아니냐? 네가 중생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상카라[行]의 무더기일 뿐이다. 이 무더기에서는 어떠한 중생도 발견되지 않는다. 중생이 색온(色蘊), 수온(受蘊) 따위의 오온(五蘊)의 집합을 가리키는 단순한 용어에 불과한 것은, 마치 ‘마차’가 바퀴와 차축과 멍에 등의 결합을 가리키는 용어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중생은 없고 단지 오온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괴로움을 일으킨다. 사실, 일어나고 존재하고 소멸하는 것은 단지 괴로움일 뿐이다. 괴로움 외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중생이란 다만 개념적인 낱말입니다. 중생은 절대적인 의미에서는 존재하지 않고, 무명(無明), 갈애[愛], 집착[取], 업, 업의 생성을 원인으로, 식(識), 정신-물질[名色], 여섯 감각장소[六入], 감각접촉[觸], 느낌[受]을 그 결과로 하여 이루어진 정신-물질 과정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이러한 결과는 다시 재생과 괴로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됩니다.


PA¿ICCASAMUPPÆDA 87
87. FOUR LAYERS, THREE LINKS AND TWENTY FACTORS
Pa¥iccasamuppæda refers to four groups of factors involved in the chain of causation viz., the first group of causes in the past, the second group of effects in the present life, the third group of causes in the present and the last group of effects in the future. The groups are labelled sa³gaha or sa³khepa in Pæ¹i. They may also be translated as layers.
There are three links for the four layers, the link between the past and the present involving sa³khæra as cause and viññæ¼a as effect, the link between the present effect and present cause with vedanæ and ta¼hæ as cause and effect, and the third link between present cause and future with bhava as cause and jæti (birth) as effect. Then there are twenty factors (alæra) involved in the psychophysical process viz., live causes in the past, five effects in the present, five causes in the present and five effects in the future.

87. 네 가지 층, 세 가지 연결, 스무 가지 요소
12연기는 과거의 원인의 첫째 무리, 현재의 결과의 둘째 무리, 현재의 원인의 세째 무리, 그리고 미래의 결과의 마지막 그룹의 인과관계의 사슬에 포함된 요소 가운데 네 가지 무리를 언급합니다. 이 무리를 빨리어로는 상가하(saṅgaha), 혹은 상케빠(saṅkhepa)라고 하는데 ‘층’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네 가지 층에는 세 가지 연결고리가 있습니다. (1) 과거의 원인과 현재의 결과 사이의 연결인데, 원인은 상카라[行]이며 결과는 식(識)입니다. (2) 현재의 원인과 현재의 결과 사이의 연결인데, 원인은 느낌[受]이며 결과는 갈애[愛]입니다. (3) 현재의 원인과 미래의 결과사이의 연결인데, 원인은 존재[有]이며 결과는 태어남[生]입니다.
그리고 과거의 다섯 가지 원인, 현재의 다섯 가지 결과, 현재의 다섯 가지 원인과 미래의 다섯 가지 결과를 포함하는 스무 가지 성질(ākarā)이 있습니다.


PA¿ICCASAMUPPÆDA 88
88. THREE CYCLES
Again the doctrine of Pa¥iccasamuppæda deals with three cycles or rounds (vattas) viz., the cycles of defilements, kamma and fruits. The first cycle comprises ignorance, desire and attachment (upædæna), the second (kamma cycle) comprises kammic effort and kammic existence (bhava) and the third vipæka cycle involves consciousness, mind-body, sense-bases, impression and feeling.
The third vipæka cycle again leads to the cycle of defilement, the cycle of defilement again gives rise to kamma cycle and so on, each of the three cycles occurring one after another ceaselessly in a vicious circle. The three cycles for the samsæric round of suffering. Samsæra means continuum of næma-rþpa (psycho-physical) process occurring in terms of cause-effect, relationship.
In order to liberate ourselves from the samsæric cycle of suffering, we do good deeds. We become familiar with the Buddha’s teaching about the four noble Truths. We practise contemplation at the moment of seeing,, hearing, etc. We realize the ceaseless arising and dissolution of psychophysical phenomena. This vipassanæ insight forestalls illusion and frees us from craving and attachment that lead to rebirth and suffering.
Visuddhimagga describes the contribution of kamma to the cycle of defilement. A certain yogø sees how mind-body complex is born of kammic cycle and vipæka (kammic fruits) cycle. He realizes that there are only kamma and its fruits; As a result of kamma in the past, there arise næmarþpa in the present kamma; it gives rise to kammic deeds in present life. These kammic deeds lead to rebirth. In this way there is the arising (becoming) of næmarþpa (being) without cessation.
Here the arising or becoming of næmarþpa means the arising of phenomena from the senses e.g. seeing, hearing, etc. These lead to defilement, kamma, and rebirth successively. Thus and the næmarþpa process is conditioned by the cycle of kamma and its fruit. According to Visuddhimagga, this insight-knowledge means paccaya-pariggahañæna and ka³khævitarana visuddhi (Purity of Escape from all Doubt).

88. 세 가지 회전
또 연기법은 (1) 번뇌의 회전(kilesa-vaṭṭa) (2) 업의 회전(kamma-vaṭṭa) (3) 과보의 회전(vipāka-vaṭṭa)이라는 세 가지 회전을 다루고 있습니다.
번뇌의 회전(kilesa-vaṭṭa)은 무명(無明), 갈애[愛], 집착[取]으로 이루어져 있고, 업의 회전은 상카라[行]와 존재[有]로 이루어져 있고, 과보의 회전은 식(識), 정신-물질[名色], 여섯 감각장소[六入], 감각접촉[觸], 느낌[受]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셋째 과보의 회전은 다시 번뇌의 회전에 이르고, 번뇌의 회전은 다시 업의 회전을 일으키는 등으로, 세 가지 회전은 끊임없이 돌면서 악순환을 계속합니다.
이러한 세 가지 회전이 윤회고를 이루고 있습니다. 윤회란 원인과 결과, 즉 인과관계에 의해 진행되는 정신-물질 과정의 연속을 뜻합니다.
우리는 윤회 고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행을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성제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과 친숙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보고, 듣는 순간 관찰합니다. 우리는 끊임없는 정신-물질 현상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깨닫습니다.
이 위빠사나의 지혜로 우리는 전도된 인식에 휘말리지 않고 재생과 괴로움에 이르는 갈애와 집착으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청정도론」은 업이 번뇌의 회전에 이바지 한다고 설명합니다. 어떤 수행자는 정신-물질의 복합체가 어떻게 업의 회전과 과보의 회전에서 비롯되는지를 보며, 오로지 업과 그 과보만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과거의 업의 결과로 현재의 정신-물질이 일어납니다. 현재 업의 원인으로써 정신-물질은 현생의 업의 행위를 일으킵니다. 이러한 업의 행위는 재생을 일으킵니다. 이러한 식으로 끊임없는 정신-물질의 일어남, 또는 생성이 있습니다.
여기서 연기는 정신-물질의 일어남, 또는 생성이란 감각장소들, 즉 봄과 들음 등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뜻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번뇌, 업, 재생을 연달아 일으킵니다. 그렇게, 그리고 정신-물질의 과정은 업과 그 과보의 회전에 의해 조건 지어집니다.
「청정도론」(Vis.XIX.Ⅰ)에 따르면, 이러한 위빠사나의 지혜가 원인과 결과를 구별하는 지혜(paccaya-pariggaha-ñāṇa)로, 의심을 극복함에 의한 청정(度疑淸淨 kaṅkhāvitaraṇa-visuddhi)212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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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청정도론」(Vis.XIX.Ⅰ)에서는 “이 정신과 물질에 대한 조건을 파악함으로써 삼세(三世)에 대한 의심을 극복하고 확립된 지혜를 의심을 극복함에 의한 청정이라 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이것은 수행을 하는 과정에서 지금의 나를 구성하고 있는 정신-물질이 우연히 생긴 것도 아니며, 어떤 가상적인 원인에 의해서 생긴 것도 아니고, 신이 창조한 것은 더욱 더 아니며, 전생의 무명과 갈애와 집착과 업에 의해서 생긴 것이라고 연기법을 적용시키며 이런 원칙을 과거와 미래에 대해서도 적용시켜 나간다. 그래서 이러한 청정을 조건[緣], 즉 원인과 결과를 파악하는 지혜라고도 부른다. 그래서 오온, 즉 정신과 물질의 원인과 조건을 정확히 파악하여 모든 의심이 없어지면 그를 작은 수다원(cūḷa-sotāpana)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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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ICCASAMUPPÆDA 89
89. FOUR ASPECTS OF PA¿ICCASAMUPPÆDA
There are four aspects of the doctrine of Paticca-samuppæda that we should bear in mind. The first is the individual character of the psychophysical process that comprises the three successive existences. Although the doctrine stresses the conditionality of all phenomena, it is a mistake to believe that avijjæ, ta¼hæ and other causes concern one person while viññæ¼a, næmarþpa and other
causes concern one person while viññæ¼æ, næmarþpa and other effects concern another person. For this belief implies the total extinction of a living being after death, the annihilation-view which Buddhism rejects. In reality, the næmarþpa process is analogous to, say, the evolution of a mango tree. The mango seed becomes a seedling, the seedling turns into a young plant and the plant grows into a tree. Here the seed, the young plant and the tree form a continuous, unbroken line of cause and effect relationship so that strictly speaking, it is impossible to distinguish between the tree and the plant.
Likewise avijjæ, sa³khæra, viññæ¼a, etc occur in unbroken succession in terms of cause and effect and so it is reasonable to speak of a particular person involved in the process. It was Devadatta, for example, who committed schism and it is Devadatta who is now suffering in hell. The merchant Anæthapindika did good deeds and it was he himself who landed in the deva-world after his death.

89. 연기의 네 가지 측면
우리가 연기법에서 명심해야 할 네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연속되는 세 가지 생[三世]을 구성하고 있는 정신-물질 과정의 개별적 성품입니다. 비록 연기법이 모든 현상은 조건 지어져 있음을 강조하지만, 무명(無明)과 갈애[愛]등의 원인은 한 사람과만 연관되고, 식(識)과 정신-물질[名色]등의 다른 결과는 별개의 사람과 연관된다고 보면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견해는 죽은 뒤에 중생이 완전히 단멸되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불교에서 부정하는 단멸론입니다.
사실, 정신-물질 과정은 망고 나무의 생장과 비슷합니다. 망고의 씨앗이 묘목이 되고, 묘목은 어린 나무가 되며, 어린 나무는 큰 나무로 성장합니다. 여기서 씨와 묘목과 어린 나무, 다자란 나무가 원인과 결과 관계의 끊이지 않는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서, 다자란 나무와 어린 나무를 구별하기는 불가능합니다.
마찬가지로 무명, 상카라, 식 등은 원인과 결과에 의해 끊이지 않고 연속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그러한 과정과 연관된 어떤 특정한 사람을 거론하는 것은 합당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승가를 분열시킨 자는 데와닷따였으며 지금 지옥에서 고통 받고 있는 자도 데와닷따입니다. 선행을 한 자는 아나따삔디까였으며 죽어서 천신계에 태어난 자도 바로 아나따삔디까입니다.


PA¿ICCASAMUPPÆDA 90
90. THE FALSE VIEW OF SÆTI
This identification of the doer of kammic dead with the bearer of its fruit makes it possible for us to avoid the annihilation-view. On the other hand, some people believe in the transmigration of a living being as a whole from one life to another. This mistaken view called sassatadi¥¥hi (eternitybelief) was held by bhikkhu Sæti in the time of the Buddha.
It was the Jætakas that led bhikkhu Sæti to this view. He learnt how the Buddha identified himself with the leading characters in these birth stories. So he reasoned thus: the physical body of the bodhisatta disintegrated after his death and there was nothing of it that passed on to his last existence. It was only the consciousness that survived phys ical dissolution and that formed the hard core of the bodhisatta’s personality in each of his existence. The same may be said of every other living being. Unlike the physical body, consciousness is not subject to disintegration. It passess on from one body to another and exists forever.
But the Jætakas underscores only the continuity of the cause and effect relationship in terms or the doer of kamma and the bearer of kammic fruit. They do not imply the transfer of viññæ¼a or any other attribute intact from one life to another. Everything passess away but because of the causal connection, we have to assume that the hero of a Jætaka story finally became Prince Siddhattha. So after questioning Sæti, the Buddha says that viññæ¼a is conditioned, that it cannot arise in the absence of its relevant cause.
The Buddha cites the simile of a fire which is designated according to its origin. The fire that originates with wood is called wood- fire, that which starts with grass is called grass- fire and so on. Likewise, consciousness is conditioned by something and it is labelled according to that which conditions it. Thus the consciousness that arises from eye and visual form is called visual consciousness (cakkhu-viññæ¼a), that which stems from ear and sound is called auditory consciousness (sota-viññæ¼a) and so forth. In short, the consciousness is specified according to the sense-object and the sense organ which together give rise to it. When the cause of a fire changes so does its designation. A grass-fire becomes a bush- fire when the fire spreads to the bush. In the same way consciousness changes its label according to the sense-object and the sense organ on which it is dependent. In the case of the same sense-objects and the same sense organ, too, it is the new consciousness that occurs at every moment in the mental process. Thus to realize the truth about mental process is to be free from annihilation-belief whereas a false view of it leads to eternitybelief.

90. 사띠 비구의 사견
이렇게 업의 행위를 한 사람과 그 업의 과보를 받는 사람을 동일하게 보면 우리는 단견을 피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중생이 옮겨간다고 믿습니다.『중부』「대애진경(Mahātaṇhāsankhaya Sutta)」(M38)에 나오는 부처님 당시의 사띠(Sati) 비구가 지녔던 이러한 그릇된 견해를 상견(常見)이라고 합니다.
사띠 비구가 이러한 사견을 가지게 된 것은 그가「본생경」을 읽었기 때문으로, 부처님께서는 이러한「본생경」의 이야기에 나오는 주인공은 바로 자신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사띠 비구는 이렇게 추론했습니다. “보살의 육체적인 몸은 죽어서 분해되었기 때문에 보살의 마지막 생까지 전달된 것은 그 가운데 아무것도 없지만, 육체가 분해된 뒤에도 잔존하고, 각각의 생에서 보살이라는 개별적 실체의 중핵을 이루는 것은 오직 식(識)213이다. 다른 모든 중생도 마찬가지이다. 육체적인 몸과는 다르게, 식(識)은 분해되지 않고 한 몸에서 다른 몸으로 옮겨가며 영원히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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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 상좌부 불교에서는 마음(心 citta)과 식(識 vinñāṇa)을 동의어로 간주하며 사실상 아무런 구분 없이 쓰고 있다. 굳이 구분하여 본다면 찟따(citta)는 마음이나 식등을 뜻하는 가장 보편적인 의미로, 윈냐냐(vinñāṇa)는 여섯 감각기관[六根]과 여섯 대상[六境]이 있는 곳에서 따라 일어나는 마음의 뜻으로 많이 쓰인다.「청정도론」(XIV.82)에 따르면 ‘식(識 vinñāṇa)과 마음(心 citta)과 마노(意 mano)는 뜻에서는 하나이다.’라고 한다.
그리고 마음과 관련해서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것은 한글이나 영어로는 그냥 마음이나 mind란 단어하나로 우리 마음의 여러 가지 현상이나 기능들이 다 표현될 수 있지만 아비담마에서는 다르다는 것이다. 아비담마에서 표현되는 우리의 마음과 심리현상에 관련된 용어를 간단히 정리해보기로 한다.
① 마음[心]으로 옮긴 찟따(citta)는 주로 우리의 생각이나 사고 일반을 나타낸다. 그리고 아비담마에 의하면 이 찟따는 마노(mano)와 윈냐나(vinñāṇa)를 다 아우르는 개념으로 쓰인다. 그래서 영역도 mind, consciousness, state of consciousness로 다양하다.
➁ 마노[意]로 음역한 마노(mano)는 우리의 생각을 관장하는 감각기능(根 indriya)이거나 감각장소(處 ayatana)의 개념으로서만 등장한다. 중국에서는 의(意)로 번역했지만 현재 우리가 이해하는 意와 mano의 의미는 전혀 다르기 때문에 마노라고 음역한 것이다. 영역은 보통 mind이다.
➂ 식(識)로 옮긴 윈냐냐(vinñāṇa)는 여섯 감각기능(六根)이나 감각장소(六處)가 그 각각의 감각대상(六境)과 부딪혀서 일어나는 식이다. 그래서 윈냐나는 모두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의 6가지가 있다. 영역은 보통 consciousness이다.
➃ 마음부수(心所 cetasika)는 마음(citta)과 함께 결합되어 일어나는 정신현상이며 전체 인식 행위에 있어서 마음이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도록 돕는 것이다. 마음부수들은 마음 없이는 일어나지 못하며 마음은 마음부수법과 완전히 분리되어서 단독으로 일어날 수 없다. 역할로 보면 이 둘이 상호 의존적이지만 마음을 근본적인 것이라고 간주한다. 마음부수는 인식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인인 마음에 의지하여 대상을 인식하도록 돕기 때문이다. 영역은 mental concomitants이다.
➄ 정신[名]으로 옮긴 나마(nāma)는 오온(五蘊)에서 물질[色]을 제외한 느낌[受], 인식[想], 심리현상들[行], 식(識)의 네 가지를 뜻한다. 그리고 여기서의 식(識)은 단지 대상을 아는 것이라고 아비담마에서는 정의한다. 영역은 mind, mentality이다.
그리고 후대 주석서와 아비담마에서는 찟따(citta), 마노(mano), 윈냐냐(vinñāṇa) 이 셋을 같은 것이라 정의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찟따(citta)와 마노(mano)는 위에서 보듯 그 사용처가 분명 다르다. 그러나 찟따(citta)와 윈냐냐(vinñāṇa)는 별 구분 없이 사용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찟따(citta)는 마노(mano)와 윈냐나(vinñāṇa)를 포함한 마음 일반을 나타내는 용어라 보면 되겠다. 그렇기 때문에 빨리어 원어에 대한 이해 없이 이것들을 그냥 마음(mind)하나로 뭉뚱그려서 이해하거나 한문이나 영어 해석에만 따라 가다보면 왜곡된 이해를 할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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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본생경」은 업을 행한 자와 그 과보를 받는 자로써 원인과 결과 관계의 연속성만을 강조하지, 식(識)이나 또 다른 특성이 고스란히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전이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사라지지만 인과적 연결 때문에, 본생경 이야기에 나오는 영웅은 마지막에 싯닷타 태자가 되었다고 추정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사띠 비구에게 질문하시고 난 부처님께서는 식은 조건 지어진 것이며 그에 상응하는 원인이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것214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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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 부처님은 식(識)이 윤회의 주체라고 이해하고 있던 사띠 비구를 크게 나무라시면서 “참으로 나는 많은 방법으로 식(識)은 조건 지어져서 일어난다고 설하였고, 조건이 없어지면 식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였다.”라고 강조하셨다. (M.38/i.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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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는 식을 그 연료에 따라 이름 붙여지는 불의 비유를 드셨습니다. 장작에서 일어난 불은 장작불이며, 건초에서 시작된 불은 건초불 등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식은 언제나 무언가에 의해서 조건 지어지며, 식은 조건지우는 것에 따라서 이름 지어집니다.
그래서 눈[眼]과 형상[色]에서 일어나는 식은 안식(眼識)이라고 하며, 귀[耳]와 소리[聲]에서 일어나는 식은 이식(耳識)이라고 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함께 맞부딪쳐 식(識)을 생기게 하는 감각대상[境]과 감각기관[根]에 따라 식은 세분화 됩니다.
불의 원인이 바뀌면 그 이름도 바뀝니다. 건초불이 관목으로 옮겨 붙이면 관목불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식이 의존하는 감각대상[境]과 감각기관[根]에 따라서 식은 그 이름을 바꿉니다. 같은 감각대상과 같은 감각기관에서도, 정신과정의 매 순간마다 일어나는 것은 새로운 식(識)입니다. 그렇게 정신 과정에 대한 진리를 깨닫는 것은 단견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반면에 정신과정에 대한 그릇된 견해는 상견을 가지게 합니다.


PA¿ICCASAMUPPÆDA 91
91. DISTINCTIVE CHARACTER OF EACH PHENOMENON
Another aspect of the doctrine is the distinction between the different phenomena constituting the chain of causation. Thus avijjæ is a distinct phenomenon that conditions sa³khæra; sa³khæra is another different phenomenon that leads to rebirth and so on. To differentiate these phenomena is to realize their cause-and-effect relationship and this realization makes us free from eternity-belief. It helps us to do away with the illusion of a permanent, unchanging self that survives death and passes on to another existence.
In fact the eternity-belief or the annihilation belief stems from the fact that people tend to overemphasize either the connection between the mental states in two successive lives or the distinction between them. If we unintelligently identify ourselves with the næmarþpa in the present life and that in the previous life, we will be inclined to the belief in immortality. On the other hand, if we overstress the dichotomy of the næmarþpas, we are likely to fall into the trap of annihilationview.
The right attitude is to recognize the unbroken stream of næmarþpa that flows from one life to another in terms of cause and effect. This point of view gives us the impression of the individual character of næmarþpa and as such it clarifies the working out of kamma. It does not, however, imply the transfer of old næmarþpa or ego. It assumes the cessation of old næmarþpa and the arising of new næmarþpa in the present life on the basis of past kamma.
This view is crucial in vipassanæ practice. To the yogø who contemplates næmarþpa at every moment of their asising, these two aspects of the doctrine are apparent. He becomes aware of the stream of cause and effect comprising avijjæ, ta¼hæ, upædæna and so forth. He is aware of the continuity, and the uninterrupted flow of næmarþpa process and therefore he rejects the annihilationview completely.
Furthermore, being aware of the new phenomenon that arises whenever he contemplates, he discriminates between the sense-object and his consciousness. Contemplation brings to light feeling, craving, clinging, effort, consciousness, etc as distinct phases of the mental process. And because he is well aware of the arising of new phenomena, he frees himself from eternity-belief.

91. 각 현상의 분명한 특성
연기법의 또 다른 특성은 인과의 사슬을 이루고 있는 다른 현상들 간의 구별입니다. 그래서 무명은 상카라를 조건지우는 분명한 현상이며, 상카라는 재생 등에 이르는 다른 분명한 현상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구분하는 것이 원인과 결과 관계를 깨닫는 것이며, 이 깨달음은 우리로 하여금 상견에 휘말리지 않도록 합니다. 또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자아가 죽은 뒤에도 남아서 다른 생으로 옮겨간다는 전도된 인식을 없애는데 이바지 합니다.
사실, 상견이나 단견은 사람들이 연속적인 두 생 간의 정신 상태의 연결이나 그 두 생 사이의 구분을 지나치게 강조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만약 우리가 지혜롭지 못하게 현생과 전생의 정신-물질을 자신과 동일시한다면, 상견으로 치달릴 것입니다. 반면에, 정신-물질이 딱 양분되어 있음을 너무 강조하면, 단견의 덫에 걸리기 쉽습니다.
올바른 태도란 원인과 결과로 인해 한 생에서 또 다른 생으로 중단 없이 흐르는 정신-물질의 흐름을 인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의 핵심은 정신-물질의 개별적 본성에 대한 인상을 우리에게 각인시켜 주고, 그렇게 함으로써 업의 작용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하지만 이는 과거의 정신-물질이나 자아의 전이를 암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이전의 정신-물질이 소멸하고 현생에서 과거의 업에 토대를 둔 새로운 정신-물질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견해는 위빠사나 수행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매 순간 일어나는 정신-물질을 관찰하는 수행자에게는 연기법의 이 두 측면이 명백합니다. 수행자는 무명과 갈애와 집착 등으로 이루어진 원인과 결과의 흐름을 알게 됩니다. 수행자는 정신-물질 과정의 연속성과 중단 없는 흐름을 알기 때문에 단견을 철저히 배격합니다.
게다가, 관찰할 때마다 일어나는 새로운 현상을 알고 있기에, 수행자는 감각대상과 그것을 아는 마음을 구별합니다. 관찰을 하면 느낌, 갈애, 집착, 노력, 식 등은 정신과정에서 별개의 단계로 뚜렷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수행자는 새로운 현상이 일어남을 잘 알기 때문에 상견에서 벗어납니다.


PA¿ICCASAMUPPÆDA 92
92. ABSENCE OF EFFORT (AVYAPARA)
Another aspect of Pa¥iccassamuppæda is the absence of effort (avyæpæra). Avijjæ causes sa³khæra without striving and sa³khæra does not strive to create rebirth. Knowledge of this fact means insight into the non-existence of any agent or being (kæraka-puggala) who hears, sees, etc., and as such it makes us free from ego-belief. But as Visuddhimagga says, it lends itself to misinterpretation and turns one into a moral skeptic who accepts determinism and denies moral freedom.
The non- volitional nature of conditioned psychophysical phenomena is apparent to the yogø who contemplates their ceaseless arising and dissolution. For he realizes clearly that since næmarþpa is conditioned, his mind and body do not always act according to his desire.

92. 노력 없음
연기의 또 다른 측면은 노력 없음(avyāpāra)입니다. 무명은 노력 없이 상카라를 일으키고, 상카라는 노력 없이 재생을 일으킵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지혜는 보고 듣는 어떤 주인공이나 행위자(kāraka-puggala)가 없다는 데 대한 통찰지를 뜻하며, 그리하여 우리는 유신견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청정도론」(Vis.Ⅷ.313)이 설하고 있듯이, 이 원리를 잘못 이해하면 운명론(niyata-vāda)215을 받아들여 도덕적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도덕 회의론자가 되기 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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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 운명론(niyata-vāda)이란 인간의 행위를 포함하여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것이 정해진 때와 장소에서 일어나도록 미리 정해졌다고 생각하는 철학사조이다. 숙명론(宿命論) 또는 결정론(決定論)이라고도 한다. 고대 인도에서는 육사외도(六師外道)중 하나인 막칼리 고살라(Makkhali Gosāla)가 주장한 학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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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물질 현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찰하는 수행자는 조건 지어진 정신-물질 현상이란 원래 의지가 없음을 똑똑히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정신-물질이란 조건 지어진 것이기 때문에, 수행자의 마음과 몸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항상 따라주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깨닫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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